voice21 로고

 

 

 

9월호 커버스토리

 

커버스토리
 

당신은 어떤 유형입니까?

눈감으면 코 베가는 대학, 눈감고 코 내주는 크리스천?

"난 예수를 사생아 출신의 영웅이라 생각해!"

20년 넘게 계속해온 지적(知的) 자살

홍길동, 대학에가다 역자 김성현씨(GSF 협동간사)

 

데스크칼럼
 

'많이 고민했다'는 것은...

커버논단 1

현대 문화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Part 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대단히 원론적인 화두지만, 다시 한번 끄집어 내 보자. 차근차근 모든 원리에서부터 점검해 보기 위해 지겹지만 바닥부터 생각을 맞춰 가보자.

Part 2.로 건너뛰기 (추천하지 않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원론적인 질문. 우리는 그 답을 로마서에서 찾을 수 있다. 잠깐 개괄적인 것을 보고 가는 것이 순서이겠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를 반역하여 늘 불의를 행하는 타락한 존재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있다. (로마서는 축복이니 사랑이니 놀라운 계획이니 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먼저 진노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에 유념하자.) 지금 우리는 늘 허망한 삶을 살아가며, 사사건건 진리를 거부하며 배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진노를 발하고 계신다. 이것이 인류가 처한 '큰일날 상태', 곧 우리의 끔찍한 현실(現實)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진리대로 행치 못하고, 또 그저 우리 마음에 좋을 대로 행하면서 어둠 가운데서 살고 있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내어버려진' 우리들의 상태, 그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진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다. 칭의와 성화의 기적, 바로 구원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가 있다. 이 역사의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홀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반응', 이런 식의 협동 구조가 아닌….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자랑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 전적(全的)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 세상과는 구별된 자로서, 주어진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우리의 지정의가 기본적으로 늘 진리의 원리 안에서 행하도록 변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방식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그 진리를 드러내고 고백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우리는 이 땅의 불의를 분명히 거부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단지 행동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살면서도 그것을 '괜찮은 일'처럼 생각하거나, 적극적으로 불의를 거부하고 사는 것을 마치 '손해 보는 삶'처럼 생각하는 태도까지도, 그 정신까지도 분명한 잘못이며 죄인 줄 알고 적극적으로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 식의 삶의 모습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이며 궁극적으로 불신자들의 생활 양식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여전히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제시해 주신 세세한 삶의 법칙과 원리를 따라 살아가지 못하고, 그 동안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갔던, 우리의 사고와 정신을 지배해 왔던 세속의 원리에 여전히 찌들어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도전해 오는 시대 정신들, 즉, 상대주의 다원주의 개인주의로 명명되는 오늘날의 세계관과 사조들은, 그런 점에서 엄중하게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 정신들은,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따라서 거룩한 성도로서 살아갈 진리의 법칙, 삶의 표준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 든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수많은 물음들이 존재한다. 세상에 하나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너도 옳을 수 있지만 나도 옳을 수 있는 것 아니냐,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느냐, 너는 그것을 주장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주장한다, 세상에 완전한 교회가 어디 있겠느냐, 대충 살다가 가는 것이지…, 왜 너는 너만의 사상을 나에게 주입시키려 하느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구원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 뭐든 열심히 잘 믿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느냐…. 이런 모든 말들은 결국 그 밑바탕에 하나의 소리, 하나의 사상이 깔려있는 것이다. 인류가 타락의 때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살아온 반복되는 사악한 반역의 질문들이다. 곧 하나님이 어디계시냐는 것이다. 그분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분의 주권(主權)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시대 사상의 거대한 바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도 강한 힘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깨뜨리고 나아가기에 두렵기 그지없는 도도한 흐름이다. 언제나 이 싸움에서 우리는 각개 전투로 나아가 승리할 수 없었다. 그리나,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대항하며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된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다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당연히 그 답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그분이 보여주신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달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늘 원론적인 이야기뿐이라고 투덜거리시는 분들이 있는데, 원리부터 차근차근 짚고 넘어가자는 심오한 뜻에서 이러는 것이니 이해하시라.) 여기에 뒤따르는 당연한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보여주신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적 세계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세상을 볼 때는, '관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그것을 '세계관'이라고 많이 표현한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무엇인가,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나와 세상은 어떤 관계인가, 신은 있는가, 신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싫든 좋든 이런 관점들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경적 세계관이 주어져 있다.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그분의 은혜로 인해 우리가 깨닫게 된 세계관이다. 나와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이고,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며, 그러나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으로 인해 거듭난 백성으로서, 주의 법을 지키며 호흡이 있는 동안 죄악된 이 땅을 살아가다가, 주께서 허락하시는 그 때에 그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영광 중에 거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것…. 간단하게 몇 마디로 표현한 이 성경적 세계관이 우리 중심에 정립되어 있을 때, 우리는 세속 정신과 투쟁하여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 '승리'할 수 있다. 또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시대 정신의 정체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수많은 사상들의 근본적인 정신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의 말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려는 같잖은 시도인 것을 비로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적 세계관의 핵심은 무엇일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일관된 체계의 대답을 얻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믿는다. 이것이 성경적 세계관의 가장 큰 축이며 기준이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왜 만드셨는가? 여기에는 그의 기쁘신 뜻 외에 그 어떤 다른 이유도 없다. 우리는 왜 타락했으며 세상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역시 이것도 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속한다. 교회는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왜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상한 족속이 되어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 주권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안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때문에 존재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지금의 세상이 있고 교회도 있고 나도 있는 것이다.

이 세계관의 큰 틀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하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 쉬신 창조의 사역에서 그 기본 구조가 드러난다. 잠시 머리 복잡한 접근을 해 보자.

먼저 창조와 타락과 구속에 이르는 역사는 창세기 6일간의 노동의 기간에 대응된다. 이것은 곧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6일간 일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께서 주신 은사로 이 땅을 경작하며 다스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사명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위임받은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일곱째 날 안식의 때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큰 틀이다.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Click!!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지킬 법칙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양심의 법, 곧 하나님의 도덕법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나 부패한 본성을 좇아 늘 하나님께 반역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모든 일이, 선(善)을 행한답시고 행하는 일까지도, 어쩔 수 없이 악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이제 내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령의 주권적 역사에 따라, 이 땅에서 구체적인 직업을 갖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생애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식 아래 자연스럽게 문화가 창출되는 것이다. 무슨 '문화 명령'이라는 것이 따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의 문화 창조라는 개념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그러나 또한 생각할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안식을 기다려야 한다. 노동은 계속될 수 없다. 하나님의 목표는 이 땅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잘 이루어 가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이 아니다. 목표는 칠일 째 주어지는 안식에 있다.

그 안식의 상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원한 세계이다. 그것을, 그 선의 충만한 상태를,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바른 자세이다. 우리는 부조리와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안식할 소망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호흡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초월해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주의 나라를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그것은 우리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Part 2.에서 계속 . . .

나눔터

토론마당

과월호 읽기

e-mail 회원가입

황희상 편집장

 

Copyright 1995 voice21 / But all right unreserved. contact us
본지에 실린 모든 글은 별다른 허락 없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