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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커버스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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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데스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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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대담 '홍길동, 대학에 가다' 역자 김성현씨(GSF 협동간사) 지상대담 '홍길동, 대학에 가다' 라는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나 이유는 무엇인가? 1997년 가을에 대학 동기인 대전 IVF 노종문 간사로부터 이 책의 원전인 'Chris Chrisman Goes to College'라는 책을 빌려 보게 되었다.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일반적인 반기독교적 분위기와, 캠퍼스 기독 동아리들의 반지성적인 태도 때문에 많이 고민했었기 때문에, 미국 대학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날카롭게 그린 첫 장의 이야기에 당장 빠져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90년대 말의 한국 사회와 대학도 이 책이 그리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 대학의 문제들은 좋든 싫든 미국 대학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한국 대학에서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우리 식 대응을 생각하기 전에 우선 미국을 잘 아는 저자가 어떻게 대안을 제시했는지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두 세 장을 읽은 후, 혼자 읽기가 아까워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좀 더 꼼꼼히 읽고 싶어 조금씩 번역해서 천리안의 GSF(대학원생회) 동호회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했다. 책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러나 대충 번역한 것이니까 배포는 하지 말라는 단서를 달고 대학원생 지체들과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한국 IVP에서 정식으로 출판 제의를 해왔다. 대학문화 속에 들어가게 되는 크리스천들은 많은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대학생과 크리스천 사이에서 한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괴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80년대 학번인 나는 두 가지 혼란을 겪었다. 하나는 대학에서 내 사고체계를 좀 더 엄밀하게 세우려고 노력하면서 지금까지 다분히 순진(naive)하게 주입된 내 신앙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었고, 그것은 나름대로 혼란스러운 과정이었다. 또 하나는 아마 80년대 후반의 특수한 상황에서 생긴 것 같은데, 소위 '사회 참여'의 문제, 즉 내가 가진 기독교 신앙과 현 사회의 문제들을 함께 놓고 볼 때, 과연 내 신앙 양심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고, 교회는 이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고민, 그리고 실망과 좌절감 등이었다. 친구나 후배들 가운데서는 이러한 혼란 가운데 결국 자신의 신앙을 버린 경우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신앙을 지킨 경우에도, 대학원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세속 학문과 대면하면서 우리가 배운 기독교적 지성이 무력해짐을 많이 느꼈다. 학문의 패러다임과 신앙의 패러다임 사이의 괴리를 견디다 못해 신앙을 버릴 뻔했던 후배도 있다. 이것은 대학문화가 진리 개념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기도 하고, 교회가 지성을 무시함으로써 대학문화를 대면할 힘을 대학생들에게 길러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교적 온건한 합리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은 그것을 증명해보라는 것이었다. 즉, 비신자들은 기독교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크리스천이 합리적으로 신앙을 설명해 주어서 그것이 납득되면 (물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겠지만) 받아들일 자세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대학문화가 현대성의 말기 현상, 즉 포스트모던으로 이어지는 극단적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로 물들면서 오히려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고, 기독교가 유일성과 배타성을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따돌림당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대학문화에서 혼란을 경험하는 기독 학생들이나 선교 단체는 주로 어떻게 대응하며, 그러한 방법은 어떻다고 평가하는가? 혼란에 직면하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교회나 선교 단체는 나름대로 도움을 주고 있으나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대학문화를 파악하고 이것에 유연하게 성경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필요한데, 오히려 대면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우리 교회는 영성을 지성과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지성적인 탐구를 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영성을 국한시켜 왔다. 이런 경향은 심지어 지성적 측면을 강조해 온 선교단체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대학생들은 캠퍼스에서 대면하는 혼란들과 씨름하기보다는, 주일에는 교회로, 주중에는 캠퍼스 내의 게토나 다름없는 동아리방으로 숨어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최근에 캐나다 IVF에서 교수 및 대학원생 사역을 담당하시는 분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 분 말씀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대학들에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 자신들이 그런 대학에 걸맞은 수준밖에 안 되는 지도 모른다 (maybe we deserve it)"고 하였다. 즉, 대학 복음화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대학 구성원(그것도 학생들에 주로 중점) 개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매달려 있지, 대학 자체를 위해 기도하거나, 바람직한 대학의 모습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기독인 개인 또는 선교단체가 대학의 문화와 삶 속에 한 구성원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데 문제가 크다고 생각한다. 대학에 다원주의 문화가 들어왔기 때문에, 어찌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대학에서 기죽을 이유가 없다. 엄밀히 따지자면, 기독교도 받아 들여져야 할 하나의 문화에 해당할 테니까. 그러나, 기독인들이 사회 따로 교회 따로인 것처럼, 캠퍼스에서도 늘상 자기들끼리만 모여 다니면서 대학 따로, 기독 동아리 따로 식으로 겉돌면 결국 직무 유기라고 생각한다. 기독인 개인들과 기독 동아리들이 좀 더 대학 문화의 적극적인 구성원들이 되면 좋겠다. 신앙 문제는 개인의 가치관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많다. 진리의 선포와 개인의 가치관이라는 애매 모호한 구분선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게 된다. 크리스천이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가? 구원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는 양보할 수 없는 한계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과의 "대화"에서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정말 비신자들을 볼 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원한다면 말이다. 비신자들을 지옥에나 떨어질 죄인으로, 나는 구원받았으니 너희들 보다 잘났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한편, 사회 문제나 윤리적인 문제라면 훨씬 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구원의 문제를 말할 때는 단지 "태도상" 주의가 필요하다면, 이런 문제에서는 심지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란 사실 하나님의 뜻을 지금 상태에서 이해한 정도에 불과하다. 사회 문제나 윤리적 질문에 정답을 제시하거나 비판할 때는 적어도 우리가 삶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선까지만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경적 세계관이나 원리들을 공부하고 발견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보통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 좀 더 정확하게는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성경적인 관점을 갖고자 노력하자는 생각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입학을 앞둔 겨울이었다. 지금은 잘 알려진 미들톤과 왈쉬의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라는 책을 별 생각 없이 제목만 보고서 사서 읽은 때부터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세계관 스터디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기독교학문연구회나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의 활동도 알게 되었다. 선교단체로는 SFC와 IVF에 관여하면서 개혁주의 사고에 더욱 익숙해졌다. 신앙과 전공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결국 어릴 적 야심(?)이었던 물리학자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당시 예수원 대천덕 신부님의 영향으로 토지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경제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는 KOSTA(북미유학생수련회)를 통해서 훌륭한 신앙 선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송인규 목사님과 개인적 친분을 갖게 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유학 시절 한때는, 나 자신의 지나치게 지성적인 성향에 염증을 느끼고, 전도와 선교에 치우치기도(?) 했었다. 1년 정도 공부는 거의 손을 놓고, 교회 영어권 청년대학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고, 미주 한국 CCC 협동간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학위를 받고 귀국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진출하며 다시 고민은 시작되었다. 미국의 선진화된 문화에 비해 아직 뒤떨어진(?) 부분도 많지만, 한편 미국의 몹시 나쁜 문화들은 아주 빠르게 수입되는 것이 보여서 였다. 마침 대학 동기들과 후배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GSF에 연결되면서, 앞으로 우리 나라의 지성 사회를 주도할 지금의 대학원생 형제 자매들을 돕는 일에 힘을 쏟아야겠다고 생각했고, GSF 지체들과 교제하고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여러 가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 겪었던 혼란과 극복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나는 우리 나라에서 진행되어온 기독교 세계관이나 신앙과 학문의 연계 노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기존의 기학연이나 기대설 등의 활동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 더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드러내 놓고 기독교적 학문을 추구하다 보니 오히려 반지성적이며 성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가 나타나면서 기독교적도 학문적도 아닌 어정쩡한 결과가 나타날 위험이 있는 것 같다. 대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열린 태도를 갖고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하고 교양을 쌓으라는 것이다. 세속 학문이나 사회를 비판하려면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안전한 기독교 서적만 읽고 나서 어설픈 비판을 하지 말고, 진지하게 배우자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전공 분야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학생이라면(대학 진학시 학과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고, 취직 걱정을 해야 하는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또 전공과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실 수도 있는 것이므로, 모든 대학생이 전공 분야를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비기독교인들 보다 더 진지하게 자신의 전공을 탐구해야 한다. 실제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전공의 역사를 공부해 볼 것을 제안한다. 현대의 학문은 적어도 수십 년에서 수 백 년의 오랜 기간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학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하려면, 그 학문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만 씨름하기보다는 자신의 관심사와 연계되는 구체적인 문제들에서부터 성경과 전공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지금의 영역에서 또 다른 문제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학문과 신앙'의 문제가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하다. 최근에 GSF에서 George Marsden의 The Outrageous Idea of Christian Scholarship(한국 IVP에서 번역 출판 예정)이라는 책을 스터디했다. 지금껏 나온 신앙과 학문에 관한 책들 중에서 비교적 솔직하고 또 학문 세계를 실제로 잘 아는 사람이 쓴 것이다. 그런데 그 책에서도 결국 과연 기독교적으로 학문을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속 시원하게 대답을 못했다. 기독교 용어나 개념을 쓴다고 해서 기독교적 학문이라 자신할 수는 없다. 자신의 삶과 세계관 속에 성경적 사고가 녹아 들어 그것이 자신이 쓰는 글, 하는 활동에 모두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고 세속 학계에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면서 무언가 인간과 사회에 기여하는, 또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그런 학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평생 숙제라고 하겠다. 개인적으로 요즘 생각하는 것은 기독인으로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자는 것이다. 기독교적 학문이란 결국 세속 학문에서 무엇 무엇을 삭제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학문에다가 기독교 신앙이 기여하는 바를 추가하여서 그것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비기독인들이 미쳐 놓치는 부분을 보고 새로운 질문도 던지고,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요즘 우리 나라의 스크린쿼터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직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조금 설명하자면, 보통 스크린쿼터를 옹호하기 위해서 경제 논리보다 문화 논리를 앞세우는 것을 보고, 경제 논리를 통해서도 스크린쿼터를 옹호해 보면 더욱 효과적이지 않을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것은 나름대로 성경의 메시지에 영향을 받았다. 우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있는데, 각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경제학의 논리가 절대절명의 진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분명히 선하게도 사용될 수 있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보던 일단 내가 배운 경제학을 활용해 보려고 한다. 또한 학문의 가치를 생각해 볼 때, 구체적인 문제에서부터 사회 현실을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홍길동, 대학에 가다'에서도 공동체에 관해 언급하고 있었는데, 흔들리는 크리스천들에게 대안이 되어 줄 수 있는 방법이 공동체라고 보는가. 우리 개인이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사실상 "홍길동, 대학에 가다"에서 저자 제임스 사이어가 설명하다시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음을 주장해서, 종교 개혁뿐 아니라 개인주의의 씨앗도 뿌린 셈이다. 물론 생명이 걸린 성경 해석의 문제를 소수의 사제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편 나 혼자 읽고 내린 결론이 올바르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공동체, 좀 더 구체적으로는 교회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종교 개혁자들이 대항하였던 로마 카톨릭에서 약간은 다시 가져와야 하는 것이 있다. 오해는 말길 바란다. 카톨릭은 교회에 권위를 주면서 사실상 사제들과 교황을 교회와 동일시하였다. 그런 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는 여전히 권위를 가져야 하고, 그렇게 공동체적으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가 물론 지금의 특정 교단, 교회들에서 나타나고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우선은 교회가 좀 더 개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이 보이고 있는 위험할 정도의 사제 의식은 대항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위 평신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신앙의 활동성을 찾아서 이것을 교회로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위해 대학생들은 캠퍼스에서 단지 고립된 게토와 같은 공동체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열린 공동체, 대학 사회를 섬기는 공동체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학문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함께 대화하는 공동체, 그리고 학문의 영역에서는 같은 전공이나 비슷한 관심 분야에서 크리스천들이 대안적 공동체를 구성해서 세속 학문 세계와 대화하는 가운데, 기독교 신앙이 공헌할 수 있는 바를 제시한다면 크리스천들 자신 뿐 아니라, 대학 전체에 큰 유익이 되리라 본다. 즉 대학문화나 학문 세계를 무조건 퇴치해야 할 적으로 보지 말고, 그곳에서 무시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 사실은 어떤 좋은 유익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식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혼자보다는 공동체로 나가는 것이 원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가망이 있다. 그 공동체는 특히 생활 단위이자, 전공 단위인 과를 일단 기초로 하되, 대학원 정도에서는 좀 더 열린 태도를 위해 학제적 접근이 가능한 수준이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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