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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커버스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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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데스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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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진단 눈감으면
코 베가는 대학, - 밀려오는 캠퍼스의 문화와 시대 정신, 역류하지 못하고 휩쓸리는 크리스천의 모습 - '이른 아침 대학 캠퍼스에 들어서면서, 한 번쯤 무언가에 대해 '승리'할 것임을 다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또래의 교인들이나 선후배들에게 "승리하라"며 호출기의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넣어 준 적이 있다.' 대학을 다니는 젊은 크리스천들이라면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이야기.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여기 '대학'에서 도대체 무엇에 대해 승리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지를. 몇 명의 비크리스천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시키거나, 세속적인 사람들 천지인 캠퍼스에서 하루종일 평온하고 기분좋은 정신상태를 유지하면 승리를 쟁취한 것일까? 일정 시간동안 착한 일을 했거나 캠퍼스가 떠나가도록 통성 기도하고 찬양한 것, 하루종일 강의를 듣고난 후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임에도 교회에 나가 여러 가지 청년부 모임에 참가하면 적어도 찜찜하고 패배감 비슷한 상태가 플러스로 전환되는 듯한 기분, 이밖에도 장학생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 등등…. 이런 상황들이야말로 우리가 은연중에 인정했던 승리의 결과물들은 아니었을까? 굳이 '승리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뭐 이 정도면' 대학에서 크리스천으로서 비교적 정당하게 산 것은 아니었나 자위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위와 같은 정도의 수준으로는 그리 만족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눈치챘을 게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대학에서 크리스천답게 사는 것인가. 눈 감으면 코베가는 대학, 대학문화 대학이란
학문과 대학문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사상과 정신들이 난무하는
곳이다. 오늘날의 학문과 대학문화는 이성을 가진 우리에게 늘 행동과
생각을 바꿀 것을 촉구한다. 문제는 거기에 하나님의 뜻에 지극히 반(反)하는
생각과 행동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순간이 다가오면 크리스천은
그가 가졌던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상적 가치관 사이에서 언제나 갈등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갈등이 시작됨과 동시에 기독교 복음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즉 진리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여있음을 발견하고서 이내 당황하곤 했다. 현대 정신들과 각각의
학문들이 추구하는 바를 정립하지 못하고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캠퍼스에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고작 캠퍼스 전도나 소규모의 가스펠 콘서트들, 그리고
자기가 속한 선교단체에서 벌이는 봉사활동에서밖엔. 술잔 하나에 흔들리는 신앙 대학에
갓 들어온 신입생들이 크리스천으로서 맨 처음 고민하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선배들이 건네주는 술잔을 받는 순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다행히 새내기들에게 강압적으로 술을 강요하는 '무서운 선배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받아든 술잔 앞에 여러 가지 생각으로 심란해진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거야? 술을
마시지 않아도 용인되는 요즘 시대라 할지라도 그것은 술자리만의 이야기일
수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입장을 정리한 것이
대학생활하는 데에 손실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과의 특성상
인맥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데 대개 친목써클을 통해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킨다. 친목써클 활동을 하려면 유대감이 필요하지만, 술을 못
마시면 써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된다. 대개의 교제가 술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아예 써클 자체에 못 들어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써클 분위기에 적응하는 크리스천들도 있는데 대부분 신자로서
술을 마셔야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헤어나오기 어려워한다."(홍상문,
20, 전남대 의예과 1년) 물론 '크리스천이 술을 마셔야 하는가 마셔서는 안되는가'의 질문에 대한 해답엔 개인적인 신앙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주목할 점은 술 문제로 인한 신자의 고민에 누가 그 답을 내렸는가이다. 술에 대한 신자의 자세에 대한 정통 교리의 설명이나 성경적인 해답이 적다는 데 문제가 있다. 스스로가 술 문제에 대해 '신앙'에 비추어 '알아서' 판단한 다음, 그것에 안주한 채 행동하게 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나도 크리스천이야. 성경엔 취하지 말란 구절밖엔 없어. 술을 마시지 말란 명령은 없다구', '서양에서 술은 음료야. 나도 술을 음료라고 생각하며 마실 뿐이야.' ...더군다나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크리스천 선배들의 모습은 신입생들이 행동을 결정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친다. 운동(movement), 할까 말까? 고민되네? 술
문화 외에도 크리스천 누구에게나 고민을 안겨주는 또 다른 문화는 바로
'운동권 문화'. 대학에 들어가면 누구나 적극적, 소극적인 형태로 이른바
운동권 참여를 권유받게 된다. 물론 대상이 남자 새내기일 경우 더 적극적일
수 있다. 드디어 '크리스천으로서 운동을 해야하는 것인가? 아니면 해선
안 되는 것인가'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로에서 어떠한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처럼 크리스천들이 운동권 문화에 매료되는 이유는 바로 교회생활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인정과 감정적 따스함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앙이 메마른 상태에서 교회를 계속 다녀야 했던 신자의 경우는 운동권 문화에서 누릴 수 있는 인간애와 정의로움에 더욱 쉽게 사로잡히기도 한다. 또 운동을 하다보면 교회는 구제와 사회개혁적인 활동에 소극적이고 방관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한 때 교회를 다녔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고 있는 손광우 씨(23, 전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 3학년 재학)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기독교는 그러한 상황들을 '길게 보는' 관점을 가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급박하게 손길이 필요한 현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사랑하는 이들이 최루탄과 국가의 폭력 앞에 쓰러지는 것을 보게 된 내게 있어, 크리스천의 관점이나 행동은 방관자의 그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책임해 보였다." 크리스천이 아무런 준비 없이 운동권 문화에 휩쓸리다보면 결국엔 교회냐 운동이냐의 양자택일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유물론과 관념론의 차이랄까? 두 전제가 매우 상이하다. 운동권의 전제를 보면 '신'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사회를 개혁할 명분과 당위성이 생긴다. 운동권이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이들은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괴로움도 그나마 교리를 배웠거나 어느 정도 신에 대한 지식을 갖춘 아이들이어야 가능하다. 그렇게 갈등하다가 운동이나 교회, 둘 중 하나를 아예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손병동) 사실 우리 주변에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몸이 교회에 있다할지라도 그들은 이미 하나님 주권 신앙을 거부한 상태로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뻔한 대답만 연발, 기독교 싫어 싫어! 최근의 학문은, 이제 인간의 근원을 찾고,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현상들이 어디서부터 왜 오는 지 등등의 물음에 대한 대답 찾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수백년 동안 학문이 목표로 삼았던 '진리 추구'의 가치는 포기되었고, 이제는 결과에 있어서 인간에게 편리하고 유용하여 행복을 가져다 주는 실용주의로 눈을 돌렸다. 지난 학기 <민속학개론>이란 강의를 수강한 J양(23, 광주한뜻교회)은 수업 첫 날부터 민망함을 금치 못했다.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 <민속학>에 대해 설명하다가 종교의 영역을 거론하는 부분에서 "내게 있어 성경은 하나의 훌륭한 문학작품에 불과합니다."라며 전체 수강생에게 단언하신 것. 이후 토속적인 굿과 주술적인 민속신앙의 사례가 비디오와 오디오를 통해 현장감 있게 수업에 반영되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귀를 막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학문의 흐름, 세상의 흐름이 이렇다보니 기독교 역시 개인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차원에서 믿고 따르는 세상 종교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신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연구 대상이 된다. 혹 수업시간에 이러한 분위기가 공공연해지면 크리스천들은 성경 꺼내기도 두려워진다. 번번히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 그 탁월성을 드러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동성애가 왜 나쁜 것인지, 진화론의 오류가 무엇인지 사회과학의 한계가 무엇인지 공학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입을 다물었고 그들은 대답하라고 추궁하는 세상이다.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알려주어야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이제는 오히려 세상이 요구하고 있다. 우리 입을 바라보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처한 삶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신앙적인 의문에 교회가 답 해주길 원한다. 그러나 교회의 대답은 아직 미흡하기 짝이 없다. 사회주의 운동 앞에 크리스천이 되길 포기했던 손광우 군은 자신의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교회의 목회자나 교사와 상의한 바 있다. "언젠가 신한국 당사 앞에서 데모를 하고 나서 청년부 예배에 참석했다. 이 날 전도사님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서로 기본적인 바탕으로 깔고 있는 생각이 너무 달랐다. 쉽게 말해 나는 '피부에 와 닿는' 방법과 길을 원했지만 그분은 그것을 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적으로 전혀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H 교회가 <기독교장로회>였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렇듯 교회 중에서도 그나마 사회 참여적인 성향을 가진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내게 해답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게 그분의 말씀은 전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 신앙으로 이겨내라는 등의 자기 다짐식의 요구가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최선의 대답이자 뻔한 대답이 된 것이다. 진리 알아야 바른 행동 가능해
정립된 생각과 사상은 일관적인 행동을 낳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를 보여주어야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를 '잘 아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일하시며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잘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한다. 본연의 사명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 반하나님적 지성과 정신이 난무하는 캠퍼스의 흐름에 아무런 대책 없이 휩쓸려 가는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이제 알맹이 없는 '열심'은 그만 촉구하자. '기독교의 수많은 가르침과 노력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도록 하는 데 집중되고 있지만, 정작 성경은 우리의 우선적 과제가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지성)이 새롭게 변화되는 일은 요술과 같은 미신적인 기교나 혹은 피상적인 종교적 열심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진지하며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노력과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보다는 이 시대 정신에 의해 우리의 삶이 영역들이 더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 우리의 삶에 대한 건설적이며 비판적인 검토와 도전을 거부하며 우리가 경건한 체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일 것이다(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마이클 호튼, 역자 서문 중에서)'V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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