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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커버스토리

 

커버스토리
 

당신은 어떤 유형입니까?

눈감으면 코 베가는 대학, 눈감고 코 내주는 크리스천?

"난 예수를 사생아 출신의 영웅이라 생각해!"

20년 넘게 계속해온 지적(知的) 자살

홍길동, 대학에가다 역자 김성현씨(GSF 협동간사)

 

데스크칼럼
 

'많이 고민했다'는 것은...

커버논단 2

현대 문화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Part 2.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제부터 조금 민감한 문제를 다룬다. 어쩌면 놀라거나 당황하게 될 수도 있다. 자기와 똑같은 세계관을 갖고 사는 다른 신자들의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접할 때 느끼는 놀라움, 혹은 두려움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접하고 거듭난 인생으로서 이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유형 구분은 우리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양식을 조금만 분석적으로 바라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 첫 번째 자세는 방관 혹은 구분, 분리 배타적인 자세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지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이 세상은 타락했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며, 세상의 문화는 사탄이 지배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런 문화에 대적하여 반대 입장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극적으로는 세상을 등지고 오직 천국만 생각하며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만을 소망한다. 한편 적극적으로는 세상을 사탄과 하나님의 대결 구도로 보고, 그 신비한 영적 전투가 계속되는 현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 문화에 대항하고, 그것을 거부하고, 그들과 동일한 삶을 살지 않으려 애쓴다. 우리 주변에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사역단체 [낮은울타리]가 이런 비슷한 신앙 자세를 보이고 있다. 사탄 문화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과의 영적 투쟁을 선포한다. 교회사를 통해 이런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자기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곳에 틀어박혀 경건의 생활을 하거나, 세속과의 모든 줄을 끊고 수도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 대 사탄의 한판 승부에서 하나님 편을 들어야 하므로, 당연히 세상을 포기한다 태도이다.

두 번째 자세는 반대로 허용 혹은 관용의 자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삶에 무슨 관심이 있으시겠느냐'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다. 세속에서는 세속 법칙, 교회에서는 교회 법칙으로 살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는 태도가 이 생각 때문에 나타난다. 역사적으로는 영지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세상은 악하며, 우리의 신앙은 세상과 완전히 배치되는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므로 세상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육체는 어차피 악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악한 세상에 살면서 악한 행동을 하고 있더라도 우리의 영혼만 순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자유함(?)을 누린다. 요즘 많은 성도들이 이런 자세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신앙을 영적인 영역에 한정시키는 태도이다. 이런 신앙 자세가 적극적으로 표출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전혀 없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의 법칙이과 하나님의 법칙이 서로 상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나머지, 결국은 구분점이 흐려지고 하나님의 법칙이 모호해진다. 일반은총 영역을 너무 강조하게 되어, 나중에는 진리의 벽이 쉽게 무너지게 되는 잘못된 신앙 태도인 것이다. 일반은총 영역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또 그들과 함께 하는 문화 활동이 하나님 앞에서 그 나라를 이루는 일에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예가 있다.)

두 가지 자세가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모두 성속 이원론(聖俗二元論)에 해당한다. 언뜻 보면 두 번째 자세는 이원론이 아닌 듯 하지만, 엄밀히 분석해 보면 결국 하나님의 법칙이 삶의 전 영역에 영향력을 미친다고 믿지 않는 것이므로 이원론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하나님 절대주권주의와 전혀 빗나가는 사상이다.

세상의 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그분의 통치하에 있다는 신앙이 바른 세계관이다. 하나님이 마치 사탄과 대등한 위치에 서서, 세상 악을 해결하기 위해 힘들여 사탄과 전쟁을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패하시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권능이 미치지 못하는 세속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신앙이 영적인 영역에 국한된다는 식의 신앙 또한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 되심과 섭리하심에 대한 불신앙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최소한 이 이원론만큼은 당장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바른 신앙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자. 그러나 여기에도 엄밀한 구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의 자세 중에도 그 나타나는 방식에 있어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편의상 이들을 문화 적극주의문화 소극주의(또는 문화관조주의)로 표현하도록 한다. 이 두 가지 유형은 똑같이 성경적 세계관의 맥을 따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세상의 전 영역과 성도의 전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 절대 주권을 얼마나 엄밀하게 따르느냐의 기준을 두고 진리 여부를 판단해야 하겠다.

문화 적극주의는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화란의 유명한 신학자에 의해 '문화변혁주의'라는 개념으로 연구되며 적용되고 있다. (이후부터는 문화변혁주의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이 개념은 우리가 흔히 들어온 "하나님 나라" 개념과도 비슷한 것으로, 현재 한국 정통 신학의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또 수많은 선교단체나 문화사역 단체가 이 개념 하에 만들어졌고 운영되고 있다. 문화변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라는 표어로 대변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통해 그분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신다고 보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한 번 그림을 보자. Click!!

가장 큰 차이점은 시간과 공간의 불연속선이 있고 없음이다. 문화변혁주의는 세상의 연속성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중간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죄가 끼어든 것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 곧 죄를 제거하는 역사를 시작하셨고, 그래서 그 죄만 없애면 다시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리라는 것이다. 창조-타락-구속의 구조이다. 이 땅에서 죄가 말끔히 제거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그분의 문화가 이 땅에 가득 차는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아주 많이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대다수의 문화사역 단체가 문화변혁을 외치며 활동하고 있다. 이들 단체의 특징은 '헌신'과 '적극성'으로 대표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문화를 창조할 일꾼들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역을 인간이(우리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만큼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니까 서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강박관념까지도 가질 수 있다. 다시 그림을 보자. 이 땅은 변함이 없이 계속 존재한다. 단지 중간에 죄가 들어와서 모든 것이 헝클어졌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면, 창조시의 모습이 일그러져 오염되고 훼손된 피조물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고, 이렇게 우리가 이룩한 문화는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소유가 된다는 구조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하나님 나라는 빨리 도래할 것이고, 또 그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문화도 풍성해 진다는 결론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이 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문화 소극주의는 다르다. 이 신앙 자세는 "하나님의 주권 이 땅 위에!"가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 이 땅 위에!"라는 신앙 자세를 말한다. '을' 다르고 '이' 다른 꼴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스스로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일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를 변혁하고 회복시키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홀로 열어 가신다. 타락한 세상에서,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온전히 구속하시는 것이다. 이런 식의 신앙 자세는 문화변혁주의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신앙에 더욱 근접한 것이다.

문화 소극주의는 '아브라함 카이버'와 동시대에 살았던 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가, 더 나아가 '죤 칼빈'이 일찍이 견지했던 문화를 보는 정통적 시각이었다. 이를 한국의 개혁주의성경연구소 김영규 목사는 '문화관조주의'라고 표현하여 연구 및 적용을 하고 있다. (이후부터는 문화관조주의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문화변혁주의와 문화관조주의는 결국,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어디까지냐, 그리고 인간의 역할은 어디까지냐의 시각 차이로 인해 세계관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화변혁주의는 구속의 사역이 영적으로, 또 물질적으로도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러나 문화관조주의는 이것을 사람에게 관련된 부분, 즉, 성도(또는 성도의 집합인 공동체 교회)의 차원으로 본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 창조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역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문화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은 여전히 타락한 상태로 있다. 바뀌지 않는다. 구조와 질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창조부터 재림까지는 시공(時空)의 질서이고 6일간 노동하는 문화의 영역이지만, 그 이후 영원은 안식의 영역이다. 둘 사이에 엄청난 불연속성을 갖고 있다. 시공이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안식에 있다. 이것이 문화관조주의가 가진 세계관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성경적 세계관의 큰 틀에 보다 더 일치하는 신앙의 자세는 문화관조주의이다.

문화관조주의가 올바른 신앙 자세라고 했을 때, 우리는 당장 구체적인 삶에의 적용과 사례가 궁금해질 것이지만, 우선 그 원리를 보도록 하자. 원리를 알면 가변 상황에서 길이 보인다.

문화관조주의가 주창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확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의 통치를 받는 자로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그네란 이 땅에 관심을 갖는 자가 아니다. 그의 목적지는 영원, 곧 안식의 처소이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 우리 힘으로 뭔가 해 보려 하지 않고,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서 그가 허락하신 삶을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그네는 또한 이 땅의 문화에 대해, 그것이 계속해서 더욱 더 타락하여 가는 것을 직시하면서, 그러나 그것을 바꾸거나 파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고 또 우리가 바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문화에 대해 늘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개혁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서, 모든 여건이 알맞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 뜻대로 개혁이 척척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죄악된 세상을 단지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프지만 인내하면서, 그러나 또한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개혁의 시도를 해 보면서, 그러면서도 그 개혁이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으시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인식하면서,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펼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이 되어 주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현재의 문화 속에 보이는 질서를, 그것이 부조리와 불의가 난무하는 세상일지라도,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인정하면서, 견디며, 인내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그네에게는 전부이다. 마구 달려들어 변혁하고 개혁하려는 시도는 꿈은 좋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하심을 무시하고 내가 세상을 고쳐 보겠다는 꼴이 된다.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영역에 대해 그분의 역사를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더 지혜로운 자세이다. 우리의 역할을 까닭 없이 평가절상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의 위상을 까닭 없이 비하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라는 말처럼 들린다. 방관이나 다를 바 없지 않나 싶다. 그러나 이것은 '관조'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 때문이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에도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이 공존한다. 먼저,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논의 된 바와 같이, 오늘날 문화는 하나님께서 열어 가셔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문화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든 것이 허물어져 가는 방향이며,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고 바뀌지 않는다. 이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문화 창조, 문화 변혁…. 이런 개념들에 대해 우리의 시각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시대는 결코 낙관적이지 못하다. 경험적으로 보더라도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시도는, 과학적 철학적 인문학적 모든 시도는 그 결과가 선한 쪽으로 나타나기 보다, 그 종국이 항상 좌절과 절망과 어두움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다. 우리는 문화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개혁될 대상이기 보다 멸망으로 갈 대상으로 보고 소극적인 자세로 대하는 것이다. 소극적이고 싶어서 소극적인 게 아니라 소극적일 수밖에 없기에 소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문화관조주의는 오히려 문화변혁주의보다도 더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한다. 그것은, 이 세상은 결코 나그네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세상은 언제나 늘 나그네를 안주하게 만든다. 나그네에게 정착을 요구한다. 우리에게 우리의 신분으로서 걸맞지 않은 행동을 늘 요구한다. 하나님의 법도와 방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말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나그네로서의 삶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영원한 안식을 향해 끊임없이 가야 할 우리들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누리려는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주께서 끌고 가시고자 하는 그 영화로운 자리에 이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유혹의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안주할 것인가? 결단코 그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이미 나그네가 아니다.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자연히 '투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투쟁은 어쩌면 생명을 요구할 때도 있다. 이때 우리는 진리를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인 삶이며 더 단호하게 죄와 싸워야 한다. 나그네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이 분명한데, 그것이 아닌, 엉뚱한 이 땅의 법칙대로 살기를 강요받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법도를 어기도록 요구받을 때 - 그것이 뇌물 수수가 되었든지, 주일성수에 대한 압력이 되었든지 - 우리는 그것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라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 아무리 불합리한 처우를 받을지라도, 불이익이 눈앞에 뻔할지라도 우리는 말씀 앞에서 원칙대로 순종하여야 한다. 우리는 어차피 나그네이며 안식을 향해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도중에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실망하지도, 낙심할 필요도 없다. 주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다. 문화관조주의가 문화변혁주의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라는 근거가 여기 있다.

(하나만 예를 들자. 영화 [미션]을 본 사람이라면 거기 나오는 두 신부의 모습을 비교해 보자. 원주민들을 죽이려고 다가오는 군인들에게 신부가 폭력을 수단으로 대응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주님의 가르침인 사랑을 강조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옳은가. 우리는 여기서 불확실하게나마 문화변혁과 문화관조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폭력을 쓰려는 한 신부에게 다른 신부가 "그들을 도우려면 신부로서 도우시오! … 하나님은 사랑이시오!"라고 꾸짖는 장면이 인상깊다. 신부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침략군의 총탄에 그저 쓰러졌지만 신부는 할 일을 다 한 것이며, 결과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부분이었다. 문화관조의 차원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는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문화 변혁의 관점에서 그 신부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것이다. 그저 장렬하게 폼잡고 있다가 총에 맞아 죽은 것 뿐…. 반면에 싸움에 나간 다른 신부들은, 목적이 승리에 있었다. 결과가 성공으로 나와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싸우는 도중 불리해 지자 작전상 후퇴를 한다. - 영화에서 그 장면이 상당히 강조된다. - 물론 앉아서 죽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적극적이고 무엇이 소극적인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삶의 자세가 하나님의 주권을 더 신뢰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아무리 엄청난 세속의 정신이 우리에게 다가올지라도, 우리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를 그들에게 가감 없이 담대히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문제 노동문제로 토론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대안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되돌아올 반응은 뻔하다. 남들 다 받는 촌지를 혼자 거절할 때 뜻밖의 시련이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욕을 먹고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거기서 어떻게든 이겨내고 합리화하려고 머리를 굴리지 말고, 언제나 법대로 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

우리는 잘못된 것을 분명히 잘못으로 고백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스스로 그렇게 살려고 힘쓰되,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하거나 그것을 파괴하지 않는 자세, 그 질서를 보존하며 나그네로서 사는 삶의 자세를 택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절대 주권 정신을 손상시키지 않는 정당한 행동이다. 하나님 절대 주권의 절대적인 신뢰,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까지도 우리가 요구받는 엄연한 진리이며, 올바른 세계관이며, 신앙하는 방식이며, 의연한 삶의 자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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