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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초상화 속의 부성애 .... 김정현 장편소설 아버지에 대한 재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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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장편소설 '아버지'가 전국 서점가를 강타했다. 초판이 70만부나 판매 된데 이어 재판, 삼판을 계속했고 각종 통계에서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아버지의 내면에 숨겨진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통해 진정한 아버지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는 선전문구를 빌리지 않더라도, 이 소설은 감각적이고 선정적인 소설에 식상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폭넓은 반응을 얻고 있다.

'아버지'는 소설을 가리켜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직장에서는 명예퇴직과 감원 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들고, 가정에서는 아내와 자식들 눈치보기에 급급한 '짠한 아버지들'의 슬픈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읽는 이들로 하여금 공감을 얻는다. '아버지'는 지어낸 소설이라기보다는 '내 이야기', '내 아버지의 이야기', '내 남편의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도덕적인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소설 '아버지'는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이 작품의 저변에는 교묘한 인본주의와 무신론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히 크리스천에게 무서운 복병이 아닐 수 없다. 김정현의 소설세계를 무작정 헐뜯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가 이 시대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제시한 것은 시든 한 송이 국화와 같은 허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병든 아버지의 사랑과 절망

'아버지'는 50대 공무원 한정수가 친구인 의사 남박사에게 췌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시한부의 삶에서 부딪히는 가족갈등과 내면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의 자리를 잃어버렸지만 '아버지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의 외로움과 사랑을 보여준다. 가족들이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을 경멸하고 부끄럽게 여겨도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는 가족의 안녕 만을 걱정한다는 설정은 다소 통속적이지만, 그만큼 쉽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작가 김정현의 솔직 담백한 시각과 필치가 빚어낸 작품의 완성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심정적으로나마 '불효자'이거나 '외로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리는 사랑과 희생의 아버지는 실상 '병든 아버지'이다. 육신만 불치병에 걸린게 아니라 정신까지 깊이 병들어 있다. 사회적으로 출세하지 못한 자신의 초라한 삶에 대한 절망, 가족들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일까봐 두려워하는 소심함, 불치의 병 앞에서 자신의 생을 포기해 버리는 허무의 절망. 그는 가족들에게 되도록 풍요한 삶을 남기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 채 패배의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인간적인 사랑은 있으되 그 사랑은 이미 병들어 결코 '사랑'일 수 없는데,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문제는 이 사랑을 한없이 미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 김정현은 '사람 냄새가 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에는 '사람 냄새'가 매우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한정수와 짧은 사랑을 나누었던 소령은 한정수의 사람 냄새에 끌렸고 사랑을 느꼈다. 포장마차의 인상 험한 아저씨도 사람 냄새를 강조하기 위해 설정된 듯 하다. 한정수는 유언으로 아이들을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으로 키워달라고 부탁한다.

사람 냄새. 각박한 현대 사회인에게 그처럼 향수어린 낱말이 있을까. 이런 이유로 '아버지'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실상 '아버지'가 주는 '사람 냄새'는 불투명하다. 작가가 찾아낸 '사람 냄새'는 모두가 평범하지 않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특이한 냄새이기 때문이다. 맡을 수 없는 사람 냄새라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아버지'의 사랑이 허공을 떠도는 것이 당연하다.

인생은 허무한 것인가

한정수, 그는 의학적으로는 분명히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있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만 곧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과 그리고 그 이후의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 앞에 힘없이 무너져 버린 꼴이다.

가족의 미래에 대한 책임이 어느 정도 덜어지자 그는 끝없는 허무감에 빠지게 된다. 그의 병세는 날로 짙어지고,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 속에 받아들인 죽음이라는 현실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시한부 삶을 더 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결국 그의 짧으나마 소중한 생명은 아무런 희망도,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그는 결국 자살이라는 최악의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겠다는 정수와 그의 친구 남박사의 결단은 생명의 존엄성을 내팽개쳤고 안락사를 미화시켰다. 더군다나 정수의 죽음은 장기기증이라는 도구를 통해 더 완벽하게 인도주의적인 모습으로 변모한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그분의 것이지 결코 나의 것이 아니다. 한정수의 것이 아니다. 한정수가 선택한 자살은 마치 자신과의 최후의 싸움에서 승리한 떳떳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비굴한 패배에 불과하다. 그가 정말 인간의 존엄성을 알았다면 창조주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음을 이겼어야 한다. 그의 선택은 '용기와 사랑의 선택'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딸인 지원에 대한 한정수의 사랑은 눈물겹게 아름다운 모습이다. 딸이 영문과에 합격하기를 간절히 원하여 그가 보여준 정성은 '갸륵하다'는 말이 어울린다. 자신을 격멸하는 편지에도 딸을 괘씸케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사랑으로 딸을 감싸는데 애쓴다. 그러나 그 사랑이 아무리 지극하다 한들, 사실 지원이에게 아버지란 언제나 무심한 '아버지 같지 않은' 남이었다. 지원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입학식, 졸업식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밤늦게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귀가하는 남같은 아버지에 불과했다. 무슨 소용인가.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전달될 수 없다. 우리가 눈시울을 적시는 한정수의 사랑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다.

겉으로 한정수는 '아버지이기'를 힘쓰지만, 사실상 이 소설은 잃어버린 아버지의 자리를 되찾기를 포기해버렸다. 정수는 진실한 아버지의 모습을 끝내 되찾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어떤 사랑도 전하지 못하고, 지원이에게 사과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치졸한 죽음을 선택했다. 영혼이 병들어버린 자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이름인가?

지난해 11월 30일, 숙명여자대학교 강당에서는 '메타맨 세미나'라는 조금은 특이한 이름의 세미나가 열렸다. '메타맨'이란 '변화하다(to change)' '개척하다(to reform)' '회개하다(to convert)'는 뜻을 가진 헬라어 Meta와 Man을 합성시킨 단어로 '하나님 안에서 변화된 남자'를 뜻한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가부장적인 대가족제도가 무너지고 핵가족제도가 확산됨에 따라 부권(父權)이 점차 약해져 가정에서 아버지가 설자리가 좁아진 것은 사실이다. 현대의 남편, 아버지들은 하나같이 일 중독자가 되어버린 남자, 권위를 상실하고 방황하는 남자, 올바른 신앙 안에 있지 않은 병든 남자들임을 자각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의 새로 태어남을 이끈다는 것이 세미나의 취지였다. 영혼이 병들어 무신론과 인본주의, 현세주의에 빠져버린 또다른 한정수를 막겠다는 뜻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존경받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다. 남자들은 남편으로서 한 몸이 된 아내를 사랑하며 그 아내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엡5:25, 벧전3:7).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영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자녀에 대한 청지기 직분을 아버지에게 맡기셨다. 남자들은 아버지로서 영적인 권위를 유지하면서 자녀들을 사랑으로 양육할 책임이 있다(창18:19, 엡6:4).

남편들이여, 아버지들이여, 가족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아직도 어둠의 한 구석에서 소주잔을 들이키고 있는가? 병든 자신의 육신을 저주하며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아래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는가? 창조주를 부인하지 말고 자신을 속이지 말라. 여러분은 누구든지 메타맨(Meta-man)이 될 수 있다.

글 : 강정룡 기자

소설 「아버지」

가정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면서도 어깨 위에 얹힌 삶의 무게로 언제나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 시대 아버지들의 모습을 단조롭지만 간결하고 예리한 필치로 그린 김정현 장편소설 '아버지'.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나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같은 문제작들이 계속적으로 외설시비를 불러일으키는 와중에 '아버지'는 수많은 대중들 뿐만아니라 오랫만에 평단이나 언론들로부터 호평을 들으면서, 가난한 출판사였던 '문이당'을 일약 스타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과연 '아버지'는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의 역작일까? 누군가 내게 '아버지'를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버지요? 눈물이 마르면 아버지도 사라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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