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예상되는 반박들과 그 정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언제나 되돌아오는 대답이 있다. 그것은 놀랄 만큼 한결같다.
"그래도 성장하고 있지 않느냐?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 결과적으로 사람은 늘어간다.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고 했다. 자, 보라! 교회에 나와 복음을 듣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만큼 죄인들이 회심할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방법론을 '들어 쓰신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왜 그렇게 자꾸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하는가?"
비록 하나님의 방식과 조금 어긋났다지만 그것을 통해 이 땅의 교회는 확장되어 간다는 식의 주장이다. 눈에 보이지 않느냐, 이것처럼 주님의 도구로 확실하게 쓰이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며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조차도 사용하셔서 주의 일을 스스로 이뤄 가신다는, 참으로 깊은 신앙 고백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양적 성장에 눈이 돌아간 현대 교회들의 과감한 헛소리다. 실용주의의 해악이 여기서 극명하게 보인다. 어쩌면 이것이 더욱 교묘하게 포장된 맘모니즘이 아닐까 두려워진다.
이와 같은 논리를 펴면서 버려진 가인의 제사를 용감하게 추진시키는 동안, 우리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도와 우리에게 진정 소망이 되는 진리는 어디로 가버리는가! 미국의 예이지만, 한 여론 조사에서 스스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응답자들 중 반 이상이 '절대 진리란 없다'는 답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성장 논리만 추구하는 한국의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날까 두렵다. 어쩌면 이미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4세기의 교부 크리소스톰(Jhon Chrysostom)은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이 시대의 보다 '세련된' 교인들은, 세상이 자신을 버리는 것을 정말이지 못 견뎌 하는 것 같다. 교회에 사람 수가 적으면 도대체 일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세상에게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사상 체계를 세상의 가치관에 무비판적으로 열어둔 결과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방법까지 보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귀찮아하고, "주여, 가만히 좀 계시옵소서, 지금 일이 잘 되어가고 있지 않사옵니까?"라고 항변한다. 이것이 문제다. 양보할 수 없는 선이 무너졌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빠꾸 토'를 하라고 하시면 그 즉시 모나 윷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다른 반박이 있다. 그것은 아예 이런 소리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무슨 행패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친절하게 성경 구절까지 제시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어차피 완전한 교회는 만들 수 없다, 최선을 다 하는 그들의 헌신과 열정을 그렇게 무참히 공격하지 말라, 이런 노력조차도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매도하는 너는 뭐냐, 이것이 늘 다가오는 반박의 핵심인 셈이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교회를 오직 주님의 뜻대로만 보존하여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상을 가지고 이 시대의 교회를 진단하고 있다. 물론 완전한 교회는 이 땅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를 바라며 말씀에 근거한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는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허무한 이상주의가 아닌, 실재하는 말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며 간구이자 소망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희망이 없다면 몰라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목표가 분명히 보이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러한 소망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더욱 철저히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적당히 거룩하라 어차피 이 세상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성도의 삶은 이상주의자의 그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망상이 아니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궁극적으로 거룩하게 만드실 것을 믿는 삶이다. 그래서 소망이 있다. 주께서 그리하시겠다는데, 책임질 터이니 믿고 따르라시는데,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아울러, 비난과 비판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의 비판은 세우기 위한 비판이어야지 무너뜨리기 위한 그것이 될 수 없다. 참되고 바른 교회상을 정립시키기 위해 곳곳에서 거룩한 수고를 계속하는 지체들의 협력 속에, 그리고 하나님의 친히 일하심 속에, 단지 하나의 부품처럼 이 목소리가 사용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