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열린 예배 가능한가(Ⅱ)
계속해서 이번에는 구도자 예배를 '복음을 속이는 행위'라고 보는 이유에 대해 논하도록 한다. 열린 예배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 정성을 기울인다고 했다. 물론 이것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좀더 친근하게 소개시켜 주려는 의도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사람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걸림돌을 제거하려다 보니, 꺼림칙한 인간의 '죄' 문제에 대한 메시지까지도 피하거나 약화시키게 된 것이다. 사람의 타락한 본성은 죄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 싫어하게끔 되어 있다.
복음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던가.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돌려 보내셨다. 그는 윤리적으로 뛰어난 관원이었으며 부자 젊은이였다. 요즘 말로 하면, 일단 데려다 놓으면 교회를 위해 정말 크게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돌려 보내셨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인 됨을 말씀하시고 철저한 자기 부정을 요구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부자 청년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그저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에게 '십자가의 걸림돌'을 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님과 정 반대로, 오늘날 구도자 예배에서는 그러한 부정적인 요소를 꽁꽁 감추어 버린다. 죄인들의 마음에 거리낄 만한 것을 미리 제거해 두는 것이다. 그래서 죄 문제는 크게 강조하지 않고, 대신 '교회를 다니면(예수를 믿으면) 이러이러한 점들이 좋아집니다'라는 식의 '캠페인'을 벌인다. 마치 미국의 4영리 전도 책자가 그 첫 번째 원리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시작함으로서, '당신은 죄인입니다'로 시작하는 어려운 전도를 참으로 쉽게 만들어 버렸던 것과 같다. 미안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어떤 면에서는 결국 복음을 속이는 행위가 된다. 한국 교회를 지금 이렇게 혼탁하게 만든 주범이 이것이다. 복음이 복음답게 선포되지 못하고, 온간 인간적 욕심과 열망을 허용한, 인간 가치 중심의 미개 신앙과 구분됨 없이 가르쳐진 현실이 지금의 유치한 한국 기독교를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 죄인들에게 교회는 '좋은 곳'일 수 있으나, 정작 중요한 구원의 진리는 피상적으로 다가갈 뿐이다. 그들은 교회에 나오겠지만 여전히 죄인이다. 그래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 다닌다는 것과 거듭난 기쁨으로 감격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다.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것 아니었던가!
유다를 괴롭히던 앗수르가 쇠약해지고 새 강국 바벨론이 발흥하여 유다와 애굽을 침공하려는 역사적 대 격변기. 당시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피폐한 유다 백성들의 삶의 상처를 고쳐주는 일을 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같은 평화와 사랑의 운동을 뭐라 평하셨을까. '가증하다' 하셨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렘6:14∼15상)"
당시 그들은 백성들 앞에 평화의 사자요 사랑의 사도로 보였을 것이다. 엄청난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냉혹하기만 하다. 왜일까? 왜 하나님은 그들의 번제를 싫어하시고 그들의 희생을 가증히 여기셨을까?
진리는 결코 부드럽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복음의 진수를 선포하고 그를 교회로 인도하기란 그래서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인간은 정녕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뼈 속 깊이 들려주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할 터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구원받기 이전의 큰일날 상태를 깨달은 그가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직시하고 소스라치며, 자신을 거부하고 드디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진정한 회개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오로지 교회 성장을 겨냥한 이들로 말미암아 이러한 단계는 살짝 넘어가도 무방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인간 존재에 대한 추악함의 사실은 모조리 덮어놓은 채, 그로 하여금 진리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은 채, 그가 처한 현상만 아무리 위로한다 한들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참 평강, 진정한 평강을 말하지 않고 심상히 치유하는 그들을 주께서는 꿰뚫어 보실 것이다. 가증하다고 노여워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