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왜 '마케팅'이라고 하는가?

교회 성장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새들백 교회와 윌로우크릭 교회는 공통적으로 '사람'에게 최대한 관심을 쏟는다. 이것이 두 교회의 가장 큰 성격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불신자들을 초청하고, 그들이 교회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말 그대로 이런 모습은 영혼을 향한 그들의 깊은 사랑과 열심과 헌신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성경에서 원리를 추출해 내고 그에 따른 위대한 헌신을 밑받침했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진리를 바르게 행하는 것'의 충분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친히 제정하신 방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새들백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이 교회가 어떤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일명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이다.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모든 교회가 이제 새로운 목회 사역의 패러다임에 의해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방법이 바로 '목적 추진의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교회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에 맞춰 교회의 모든 요소를 갱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들백 교회의 제 일의 목표는 전도이고, 이것은 그대로 교회의 수적 성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새들백 교회는 예배의 순서와 분위기, 음악, 설교, 예배당 건물과 주차장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모든 요소를 전도 대상자에게 맞춰 버렸다. 거기에는 눈물겨운 정성과 헌신이 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다. 세심한 노력이 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거기에서 진리의 기둥으로서의 교회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우리는 순간순간 교회의 관심이 어디에 고정되어야 하는지 기억해야 한다. 마케팅의 근본 사상은 사람들에게 잘해 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다르다. 사람들을 불러들여 전도해야 하지만, 불신자들의 비위를 맞추어 진리를 희석시키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죄인들에게 복음은 부드러운 말씨와 미소로 전달되는 성질의 것이 못된다. 죄인은 복음을 필연코 거부하게 되어 있다. 복음은 타락한 인류의 심장을 찌르는 심판의 말씀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같은 영적 전투 없이, 그저 사람을 끌어 모아 둔 것은 성도의 집합체 곧 교회가 아닌 구경꾼들의 모임에 불과하다. 이러한 곳에서 예배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예배는 당연히 거듭난 성도를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방법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새들백 교회의 '전도 집회'는 예배에 대한 정의를 무색하게 만든다. 목적 달성을 위해 교회 아닌 것을 교회로 착각함으로써 더 소중한 것을 잃고 말았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무서운 신앙(?)인 셈이다. 나름대로 자기가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향해 나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 하면 주가 이루신다는 고백…. 어찌 보면 이것은 깊은 신앙심의 표현 같지만, 사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안중에 없는, 맹목적인 신념에의 집착과 합리화로 점철된 자기 중심적 신앙인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알라딘이 요술램프를 문지르듯 그렇게 하나님을 사용하려 드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목적 지상주의'라고 표현될 수 있다. 이렇게 교회를 실용주의적 목적 지상주의가 지배할 때, 교회 부흥은 종종 그러한 목적을 제시하고 시행하는 지도자의 능력에 달린 것으로 오해되곤 한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경우, 이들은 교회 지도자에게 분명한 목적과 의식을 갖게 하고 영혼에 대한 열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장점이 있다. 영적 은사를 가진 잘 준비된 지도자와 역시 잘 짜여진 커리큘럼에 의해, 종교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까지도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헌신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를 위한 치밀한 구상과 세밀한 배려에 이 교회는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또 문제가 되는 것이, 불신자가 성도가 되고 또 그가 자라 가는 과정에 대해 오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인을 회개케 하고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너무 쉽게 망각하곤 한다. 죄인을 회개시키고, 또 그의 신앙적 측면이 자라는 것을 지도자의 인간적 능력으로 개발하고 양육(養育)할 수 있다는데 초점을 둔다. 내가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전적 은혜와 주권적 역사하심을 무시하는 교만한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양육'에 대한 생각도 다시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 시대처럼 주께서 침묵하실 때에, 인간은 두려워 떨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다 좋은 줄 알고 철부지처럼 뛰놀아서는 안된다. 아무런 문제가 없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다들 생각하는 바로 그때 선지자는 회개를 외쳤던 역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구령에의 뜨거운 열정이 있고 양을 치는 목자의 심정으로 최선을 다 함으로써, 이를 통해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하여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자. 우리는 교회 안에서 판치는 실용주의의 위험성,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정 반대되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의 사악함을 직시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데 있어서, 그것이 인간의 재치 발랄함으로 될 것이 아님을 철저히 인정하고 주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소망해야 할 것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리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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