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간 중심 철학이 침투한 신학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인류는 그 동안 수많은 자기 나름의 답을 제시해 왔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두루 지지해 온 주장을 재미 삼아 동양 철학의 이름을 빌어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보면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정도가 되겠다. 이런 비유가 합당할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두 주장은 인간을 낙관론으로 보느냐, 비관론으로 보느냐 하는 커다란 두 줄기 사상과 맞물려 지금까지도 끝없이 논쟁이 된다. 이는 펠라기우스냐 어거스틴이냐 하는 기독교식의 논쟁과 대응한다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순자의 성악설을 조금 깊이 연구해 보면 뜻밖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순자의 성악설은 기독교, 특히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는 개념이 다른 것이다. 순자는 단지 인간이 악을 행하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성악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성악설조차도 인간이 끊임없는 노력과 정진을 통해 성인 군자에 이를 수 있다고 하여, 인간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마치 알미니안주의 혼합 종교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자비의 여지를 두며 스스로 발전할 가능성을 열어 두었던 것처럼….

하긴, 당연한 일이다. 일찍이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고 말했으며, 이것은 오늘날의 뉴에이지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전형적인 인본주의이다. 맹자도 순자도 역시 인간이며,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기에 인간에게 애써 일말의 '가능성'을 부여하려 든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 나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그나마 어떤 최소한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이를 보장받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이것이 '인간 중심 철학'의 치명적 한계이다.

이제 신 중심 철학은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 중심의 신학이, 나 중심의 신앙이 온 세상을 휩쓸고 있다. 이렇게 신본주의 정통에 개입한 실용주의와 인본주의는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고 오염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본질'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것'을 설교하고 있다. 깨어 있다는 교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청년이 미래다', '주일학교를 살려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거기에 목회 초점을 맞추고 갖가지 서비스 제공에 바쁘다. 참으로 우리 주변에 익숙한 일 아닌가! 시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이미 '하나님의 관심사'는 안중에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편에서 피조물인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위치를 확보한 뒤에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조금 더 높은 곳에 모셔 두려 하는 것,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높여 드릴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실제로는 자신을 높이고 있으면서. 자신의 위치를 그토록 쉽게 망각하는 것이, 여전히 교만한 우리의 어리석고 슬픈 모습이다.

이렇게 되면 처음 제시했던 질문, 곧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대답은 인간의 지혜와 학설을 끌어와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결국 다시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신본주의로 눈을 돌려야 한다.

성경은 그 맨 첫 구절부터 신본주의로 시작한다. 여기에 반항하는 인간의 역사가 곧바로 타락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이어지는 인본주의의 극치를 바벨탑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적나라하게 보고 있다. 성경은 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상태인가를 말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지금 상태를 죄에 빠져 '대책이 없는 상태'라고 가르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아무리 성경 말씀이라지만, 그 표현이 너무나도 단호하고 직설적이다. 도대체 일말의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 그것이 부패한 우리 인간의 상태이다. 죄로 인해 그 본성이 타락하여 '완전히 더럽혀진' 인간인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제 문제는 세계관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타당하고 효과적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주변 현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만약 어긋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과감히 그것을 끊을 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원리이다. 신학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세계관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되심과, 인간의 지극히 비천한 인간 됨'을 확실히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기에, 감히 하나님의 교회를 인간이 인간의 지혜로 좌지우지하려는 시도가 아무렇게나 용납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적 교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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