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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강냉이 모임의 관계자가 직접 확인한 북한 기근 관련 최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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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지난 4월 4일부터 '한겨레' 신문이 펼치기 시작한 '북녘 동포를 도웁시다'라는 캠페인이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주간지 '시사저널'도 5월 22일부터 '겨레에게 사랑을, 후손에게 희망을'이라는 북한 동포 돕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언론 단체들이 북한 동포를 돕기위한 구체적인 성금 모금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TheVoice'는 지난호 포커스에서 북한의 실상과 한국 교회가 준비할 사항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정확한 정보 출처와 확인 절차가 없어 설득력이 미약했다는 자체적인 회의와, 또 대안 없는 단발적인 기사로 그치고 마는가 하는 독자들의 지적을 수렴하여 계속해서 북한 관련 기사를 싣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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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동포를 살리기 위해 각계 각층에서 다양한 모금 운동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영향력 있는 각종 종교·사회 단체와 언론 기관이 함께 발벗고 나서 북한 식량 지원을 위한 전국민 기금 모금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다. 참혹한 북한의 실상이 알려짐에 따라 동포에게 사랑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확대되며 구체화 되고 있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이렇게 전국적인 북한 돕기 캠페인 붐이 일어난 데에는 북한 실상을 정확히 알린 정보 제공자들에게 큰 공로가 있다는 것.
'통일 강냉이 모임'은 그런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단체이다. 이는 지난 3월 초 '두레마을'과 '대구빈들교회', '외국인노동자피난처'에 소속된 20∼30대 청년들을 중심으로 북한 동포 기아 대책을 위해 발족된 기독교인 모임이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1년 전부터 중국의 북한 접경에 거주하다시피 하면서 북한 식량 상황에 관해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동시에 북한 주민들에게 직접 식량을 전달하는 활동을 수행해 왔다. 이들은 작년 가을, 잠수함 사건 등 남북간의 긴장 상황 때문에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이 활성화 되지 않고 있던 때에도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 구애받음 없이 지속적으로 돕기 운동을 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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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강냉이 실무를 맡은 김재오씨 (외국인 노동자 피난처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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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제공하는 자료는 96년 7월부터의 북한 상황을 가장 잘 말해 주는 정보이다. 이는 북한을 가장 최근에 다녀온 중국 조선족들에 대한 인터뷰, 북한 탈출자 및 식량을 구하러 중조 국경을 월경하여 중국으로 나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북한인들을 직접 인터뷰,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마을과 마주보고 있는 중국 조선족 마을을 조사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국제·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유엔 세계 식량 기구나, 북한 정부의 안내에 따라 북한을 방문한 미국 기자나 관리들의 공식 보고서보다도 훨씬 생생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평가된다.
'The Voice'는 '통일 강냉이 모임'측에서 대략 2주 단위로 제공하는 '북한 기근 관련 정보'들을 입수하여 'Internet TheVoice'의 웹싸이트와 천리안·나우누리에 개설된 'Online TheVoice'를 통해 계속 공개하기로 하고, 우선 전체 내용 중 6회째 정보인 '기근 정보6. 97년 4월 말 상황'을 요약·소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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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기근 상화황은 풍요로운 생활에 젖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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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이 기사는 'TheVoice'의 독점 보도가 아니라 '통일 강냉이 모임'이 제공한 A4 20매 분량의 동일 자료를 바탕으로 '한겨레21', '시사저널'과 함께 기사화 한 것이며, 월간'복음과상황'을 통해서도 계속 접할 수 있음을 밝힌다. 지 교회 소식지나 주보 등을 통해 널리 홍보되기를 바란다.
수집시기·장소·방법 : 97년 4월 17일 ∼ 5월 1일, 연길시·도문시·화룡현·용정시 중조 접경 마을. 북한 탈출 난민 5명 인터뷰, 북한 난민을 보호하는 조선족 2명 인터뷰, 북한을 방문하고 4월 18일 돌아온 조선족 1명 인터뷰, 두만강변 조선족 마을 방문기. 기록일 97년 5월 5일. 정보수집자 ; 통일 강냉이 모임 K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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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업고 두만강 건넌 청진 청년
수집자 주 : 97년 4월 18일 오전 중국 연변 자치주 용정시 조양천, 외딴집 오막살이 흙집 과수원에 숨어 있는 모자를 첫 대면. 허약한 몸집에 온 몸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남루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아들(이름 0도0, 68년생, 3년전 인민군 제대, 철도전문학교 졸업), 밖으로 구멍이 뻥 뚫린 흙 방바닥에 온 몸이 퉁퉁 부어서 신음하는 예순세살의 홀어머니, 이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었다. 어머니의 목을 통해서 가슴 속으로부터 들려오는 깊은 가래 끓는 숨소리, 머지않아 숨을 거두실 것 같은 느낌.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포위되어 버림받은 인간, 초라한 인간의 전형처럼. 내 영혼은 거기서 그리스도를 보았다. 나는 신음하며 울었다. 강풍에 깜박거리는 촛불과 같이 위태한 생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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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북한은 무얼 하는지 ... 두만강 건너 북한을 버러보는 조선족의 마음은 무겁기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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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외딴집에 도착한 지 10일째, 10일 동안 아들은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어머니에게 죽을 쑤어 먹이고, 양식을 위하여 과수 나무 사이의 빈 땅을 뒤집어 감자와 옥수수 씨앗을 파종해 놓고 있었다. 청진에서 부터 중병(심장병)에 걸려 있었던 어머니는 차가운 겨울 밤 바람을 쐬며 강을 건넌 탓이었던지 병세가 악화 되어(간염, 신장염, 뇌혈증 등 합병 증세가 나타남) 몸을 가누지 못하였고 생명이 위독한 형세였다. 치료비도 없는데다 사람 눈을 피해 쫓기는 사정이어서 자포자기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수집자가 보다 좋은 장소로 옮길 것을 제안하여 이들 모자와 새로운 장소에서 10일간 숙식을 함께 하며 병 치료를 해주고 북한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의 병세는 약을 쓰자마자 놀라울 정도로 급속히 호전되어 사흘째 되던 날 걷기 시작하였다. 수집자는 이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도움과 양식을 제공 할 것을 약속하였고, 자기 땅과 고향! 조국으로 되돌아가 현재의 고난을 함께 받고 극복하기를 권하였다. 예수 믿는 이에게 은혜를 입었다며 성경책 한권을 소중히 받아들고서, 다시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겠다며 이들 모자는 내몽고로 간다고 길을 떠났다.
아들의 증언 : 제가 어머니를 엎고 두만강을 건넌 것은 97년 1월 28일 새벽 5시경 이었습니다. 군대 생활 10년 경험으로 아침 동이 트기 바로 전 시간이 병사들 근무태도가 제일 느슨해질거라 생각했습니다. 중간 지점 10미터 폭만 빼고 강물은 모두 얼어 있었는데, 그 날 날씨가 아주 추웠습니다. 중국 쪽 강변으로 건너니 언덕이 상당히 가파랐는데 어떻게 그 곳을 어머니를 업고 올라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에 젖은 몸으로 한 집의 문을 두르렸는데 조선족 가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놀란 듯 하더니 한 눈에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급히 집안으로 맞아들여 주었습니다.
3년 전 군대 생활 10년을 마치고 제대했는데, 군대에 있을 때는 밖의 식량 사정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줄 몰랐습니다. 오래 전 부터 배급할 쌀 대신 쌀 몇 키로라고 표시한 종이 쪽지만 주니 살아갈 길이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어머니와 의논한 끝에 목숨을 보존하려면 중국으로 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유일한 재산인 집을 96년 12월 말 조선돈 1만원에 팔았습니다. 굶다 못해 우리처럼 집까지 팔아 먹은 후 집 없이 거리와 역전을 떠도는 사람들이 청진에만도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 부부는 '죽더라도 밥이나 한번 실컷 먹고 죽어보자'며 집을 팔고 쌀을 사서 밥을 양껏 해놓고 어린애들과 같이 둘러 앉아 실컷 먹고…, 밥에다 쥐약을 탔는데 어린아이들은 약 탄 지도 모르고 부모들을 따라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청진시에는 95년부터 파라티푸스와 장티푸스 라는 전염병이 돌아 지금까지 수천명이 죽었습니다. 청진역에서 기차를 타고 회령까지 왔는데, 기차도 언제 출발하고 도착하는지 시간이 제대로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전력 사정과 잦은 고장 때문에 청진역 기차 시간 안내판에는 분필로 '도착시간 12시간 지연' 이라 썼다가는 잠시 후 다시 '도착시간 미정'이라고 쓰는 식으로 전 구간에서 오는 열차가 이런 형편입니다. 기차역에는 무릎을 쪼그리고 옆 사람과 딱 맞대고 앉아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어린이들이 많다)이 밤낮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다 쪼그리고 앉은 채 굶어서 죽은 사람이 매일 아침마다 세명씩은 나옵니다. 안전부 요원들이 와서 비닐로 둘둘 말아 질질 끌고 어디론가 가져 갑니다.
회령까지 올 때 타고 온 기차는 유리창이 한 장도 없었고, 내부는 의자도 없이 그냥 맨바닥이었습니다. 회령에 도착해 집 팔아서 가지고 온 돈으로 떡을 사서 어머니와 실컷 먹었습니다. 회령 장마당에 나갔는데 청진처럼 꽃잽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꽃잽이란 집과 옷 등 모든 것을 팔아먹고도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떠도는 어른이나 어린이들을 일컷는 말입니다. 이들은 대개 남의 가게나 식당 등 아무곳에서나 먹을 것이 있으면 잽싸게 훔쳐서 목구멍으로 넘기기만 하면 일이 성공하는 사람들입니다. 먹을 것을 훔친 후 음식 주인으로 부터 맞으면서도 일단 입속에다 구겨넣는데 성공하면 행복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꽃잽이들의 입속으로 음식이 빼앗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장에서는 아무리 작은 먹을 것 하나를 놓고 파는 사람들도 요즘에는 음식 위에 그물을 쳐놓고 팔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꽃잽이들은 이전보다 조금 발전하여 어떤 사람이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입술 앞에서 훔쳐서 얼른 제 입에 넣는 형태로 발전을 했습니다. 회령 시장에서 목격했는데, 한 어린아이 꽃잽이가 다른 사람 입에 들어가려고 하는 음식을 훔쳐서 제 입에 넣는데 음식주인이 왼쪽 볼을 치자 음식이 밖으로 튀어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 꽃잽이는 흙 묻은 음식을 얼른 다시 입속에 넣었습니다. 오른쪽 볼을 다시 치자 음식이 다시 튀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다시 입으로 집어 넣어 끝내는 목으로 넘겨버렸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제 앞에서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는데 결국은 죽었습니다. 안전부 사람들이 와서 그 사람 시신을 천에 둘둘 말아 치워 가면서 하는 말이 "이런 때 꽃잽이를 해서라도 먹고 살아야지, 죽는 놈만 바보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잘 사는 형편에 속했기에 큰 고생은 하지 않은 편입니다.
창피해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딱 한 번 진흙떡을 먹은 적이 있는데, 군대 생활을 하던 중 도로 공사를 하는데 부드러운 진흙이 나왔습니다. 하도 배가 고파서 남이 보지 않게 몰래 진흙을 한 줌 쥐어 먹었는데, 글쎄 뭐 위장이 가득차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청진 집에 살때 하루는 옆집(안전부원 집) 구정물 통에 쉰 쑥떡 세 덩어리가 떠 있는 것을 어머니가 주워다가 깨끗이 씻어서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우린 잘 사는 편이었습니다.
함북 세천에서 온 부부
남편증언 : 지난해(96년) 11월말 부터 시작한 파라티푸스를 97년 1월 말까지 앓았습니다. 제 아내는 자신도 역시 파라티푸스를 앓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황해도 사리원의 친정집에서부터 세천(함경북도)까지 와서 저를 간호하여 살려 주었습니다. 아내는 저와 장인어른에게 조선돈 5만원을 주며 사리원의 친정집에 가서 당분간 살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장인어른과 저는 사리원으로 함께 출발하게 되었는데 청진에서 장인어른이 돈 보따리를 들고 혼자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돈이 한푼 없게 된 나는 할 수 없이 꽃잽이가 되었습니다. 사리원에 도착했을 때는 입고 있던 옷까지 팔아버린 상태여서 속옷 바람으로 처가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장모님은 내 꼴을 보고 우셨습니다. 집에 들어가 보니 장인어른이 계셨습니다. 왜 저를 버리고 혼자서 도망을 쳤는지 물었더니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군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 장인어른은 죄책감을 못 이기고 집안에서 목매달아 자살을 하였습니다.
사리원을 떠나 다시 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천에 돌아왔다가 처형을 만났는데 아내가 중국으로 일하러 갔다가 팔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는 내 아내를 내가 죽어갈 때 살려준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찾아내어 구출하겠다고 마음먹고 한 달 전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세천은 탄광 지역이라 함북도 다른 지역보다 식량 곤란을 더 받는 곳입니다. 인구가 3천 세대(11,000명정도)쯤 되는데 작년에만도 굶어서 죽은 사람이 1천명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나올 당시에는 하루 최소 7명, 보통 10명씩 죽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콩깍지를 갈아서 먹거나 진흙떡과 백토(하얀흙)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조금 나은 사람들은 진흙에다 옥수수 가루를 조금이라도 뿌려서 먹고, 없는 사람들은 그냥 흙만 먹었습니다. 이것을 먹고 나면 똥 구멍이 막혀서 서로 똥 구멍을 파주느라 고생을 하고, 항문이 파열되어 병원에 갔다가 죽기도 하고…. 이대로 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텐데, 인구 절반도 더 죽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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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변경무역을 하는 조선족 0죽0씨의 증언
같은 민족이기에 이들의 처지를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이들이 러시아인이라 해도 나는 이들을 도왔을 것입니다. 중국 정부에서 양식 구하러 넘어오는 북한 사람들을 접대하는 조선족들에게 얼마 전부터 벌금을 물리니 북한 사람들은 더욱 심각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근처 마을들에 이야기 해서 양식 구하러 오는 분들 있으면 도울테니 연락 달라고 해서 이들을 만나는 일이 시작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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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해 자전거에 식량을 가득 싣고 출발하는 한 조선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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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식량 문제는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심각합니다. 정말 이들은 풀과 나무만 먹고 삽니다. 97년 2월 황해도 사리원에서 부터 온 김0화(여)씨를 보살폈는데,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사리원 길거리에서 길을 가다보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갑자기 퍽퍽 쓰러져 죽는다. 그래도 아무도 널부러진 시체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게 죽은 시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안전부원들이 트럭을 가지고 다니며 죽은 시체들을 수거해 트럭에 싣고 묘지로 가서 집단매장을 해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역 거래 때문에 어떤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북한과 중국을 오가기도 하는데, 회령역에 외지에서 기차가 도착하는 것을 보면, 객차 위까지 사람이 새까맣게 올라 있는 것이 보통이고 한 대가 도착하면 보통 8명씩의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나옵니다. 누가 옆에서 굶어 죽어도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죽어가면서도 밥 한 술만 먹어 보았으면 합니다. 양식을 구하러 온 탈북자들은 먹는 것 외에 다른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을 취직 시켜주면, 이들을 부리는 중국인들은 때리고, 천한 일만 시키고 학대합니다. 정말 밥만 먹여주고 임금을 한 푼도 안 주는 식입니다.
요즘에는 탈북자 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면 북조선으로 부터 미화 300불씩을 상금으로 받기 때문에 조교들, 화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96년 11월 12일날 삼봉(함북)의 공중변소에 갔다가, 대변을 보다 허기에 지쳐 죽는 사람을 직접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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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 셋의 죽음(인육 사건)
"회령시내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4월 17일) 연길로 돌아오려고 하던 중 회령사람들이 한 부부의 화형식 집행을 보기 위해 강변 시장에 가득 모인 것을 보았다. 그 곳에 가서 들은 내용은 너무나 끔찍한 것 ― 화형을 당하게 된 부부가 영양실조에 걸려 비틀거리는 10세 가량의 어린이 세 명을 유인하여 옥수수 죽을 실컷 먹였다. 죽을 먹고난 아이들이 음식에 취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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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영양상태는 매우 심각하다. 탁아소에 맡겨진 아이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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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잠들었을 때 이들 부부는 이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고 토막 내어 삶은 후, 고기는 소고기, 나귀고기라 속여서 팔고 창자는 순대를 담아서 팔았다. 날씨가 따뜻해 오래동안 보관할 수 없게 되자 이들 부부는 남은 고기를 한 식당에다 한꺼번에 넘겨 팔았다. 고기를 이상히 여긴 식당주인에 의해 신고가 들어갔고 안전부의 조사에 의해 사건전모가 밝혀졌다고 함 ― 이었다." (식량 전달차 북한을 방문하고 4월18일 돌아온 조선족 정00씨 증언)
두만강변 중국 조선족 마을 소식
매일 밤마다 밤 손님(양식 구걸하러 오는 북한 사람)이 오지 않는 날이 없다. 주로 마을 외곽 지역의 집에 많이 드는데 변방을 지키는 북한 병사들도 자주 온다. 한 집이 인심이 좋다고 북한 마을에 소문이 나면 계속 그 집에만 손님이 많아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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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방문하기 얼마 전 5개월 된 임산부가 가슴까지 차오는 얼음장처럼 찬 강물을 건너 오기도 했다. 밤 11시 이후에 개가 짖으면 이제는 북한의 밤 손님으로 당연히 생각한다. 밥도 해주면 혼자서도 밥솥 하나(5인분)를 다 먹어버린다. 혹시 남으면 밥까지 호주머니에 넣어서 가져간다. 이들이 남기고 가는 것은 '이' 뿐이다.
요즘들어 중국 정부가 북한 난민들을 맞아들이는 집에 대해 벌금(오천원)을 부과하겠다고 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따라서 이들의 마지막 희망인 '밤 손님'이 되는 것조차도 비극으로 결말 날 가능성이 점점 높아가고 있다.(4월말 주간의 조선 변경 마을 탐방 결과)
정리:황희상, 자료제공:통일강냉이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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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강냉이 연락처 : 02)553-7363 통일 강냉이 보내기 운동
참가 요령
북한 기근 상황이 해소될 때까지 1일 1끼 금식 동참과 결과 모으기
통장을 나눠주고 친구와 이웃에게 가족 단위로 참여토록 권하고 결과 모으기.
모금 운동을 위한 자원 봉사 활동 참가.
조용히 개개인을 설득해 나가는 방식으로 생명력있는 사랑의 혁명이 일어나도록 합시다.
성금계좌 안내
예 금 주 : 통일 강냉이(조동업) 농 협 096-02-144671
우 체 국 013383-0056216 국민은행 760-01-0031-878 조흥은행 355-04-292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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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oice online No.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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