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는 글

한 인간의 가치관과 삶의 형태와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지닌 세계관 혹은 철학일 것이다. 그 철학은 주로 후천적인 교육의 산물일 터인데, 특히 그리스도인의 경우 이는 교회의 말씀 선포를 통해 생성되고 수정되고 구체화된다. 교회의 말씀 선포는 무엇보다도 교역자의 신학이 그 기반이 되며, 그 신학은 목회자가 어떤 신학적 뿌리와 노선을 따르느냐 하는 것에 의해 결정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상은 그 정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신학조차도 타락하기 쉽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철학이 신학의 자리에 개입되는 것이다. 하나님 주권주의를 외치면서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전적인 섭리를 말하면서도 결국 인간에게 중심이 맞춰진 신학. 그것이 오늘 전반적인 신학의 양상이다. 교회에서 올바른 말씀 선포를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고, 바른 신학의 부재는 교회 운영과 성도들의 신앙 생활 전반에 크나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

선악에 대한 기준이 사라져 버렸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뭔가 잘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곧 옳은 것이 되어 버린다. 아무리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이라 하지만 교회만큼은 예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성경과 교회 전통은 말 그대로 내팽개쳐 버리고, 인간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좇아 행하는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만 간다. 이들은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속이고, 자꾸만 인간을 교회의 머리로 만든다. 이미 대부분의 신학교도 이같은 타락의 길을 따라 걷고 있으니,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놀라운 일이다. 시대가 바뀌었다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교리를, 입맛에 맞게 수정해 나가는 세상이다. 물론 언제나 갱신은 있어야 하겠으나, 무엇이 그 기준인지를 알고 그 바탕 위에서 올바른 법에 의해 바른 길을 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법을 모르고 있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법대로 하자는 말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풍성하게 드러났던 시대의 신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성경적인 진리를 찾기 원하고 그 진리대로 행하기 원하는 교회는, 기독교 교회의 전통 속에 꾸준히 고백되었던 신앙고백들의 흐름을 깊이 공부한다. 진리는 인간의 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옴을 가르치고, 그 진리를 잘 붙들 수 있도록 성도를 양육하는 교회가 바른 교회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신학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꼽는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든지 다 자기가 개혁주의자라고 하는 세상이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선(善)인지 모두 뒤죽박죽이 되어 있다. 그래서 바른 진리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하나님의 경륜이 풍성히 드러났던 17세기 신앙고백 문서들을 토대로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를 말하면서 각기 소견대로 행하는 자기 중심의 신학이 아닌, 정통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그 위에서 거룩한 두려움(Holy Fear)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모든 일의 운영 원리를 세워 나가는 그런 교회와 신학을 따르자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원만함 이전에, 교회의 눈에 보이는 성장 이전에, 참된 진리를 똑바로 아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 진리를 소유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자유케 되고, 그 자유함으로 다시 교회로 하여금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우며 힘써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계속되는 글에서 우리는 오늘의 교회가 무엇에 관심을 쏟고 있는지,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 그 기저에는 어떤 생각들이 담겨 있는 것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특히 한국 교계에서 바람직한 교회의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는 '새들백 교회'와 '윌로우크릭 교회'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살펴보면서 그 실체를 논하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인간 냄새나는 그 어떤 집합체에 불과한가를 하나씩 점검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바른 신학과 진리에 대한 관심이 왜 중요하며, 진리의 기둥으로서 교회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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