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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논단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문화 운동을 담당해야
일반적으로 신문은 정보 전달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가치관의 전달을 시도하는 것이 또한 신문이다. 이 상반된 두 목표
사이에서의 갈등과 딜레마는 비단 기독 신문사들만의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기독 언론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이는 지금의 기독 언론들에게 '프로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하나의 명제로 함축된다. 하나의 언론으로서 당당하게 승부 하기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기독교 세계관의 형성을 위한 노력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일부 신문사들은 아예 두 가지 모두 손뗀 것 같다.
교계 신문사들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다. 교회 언론계에서 기자
활동을 하다 보면 엄청난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교회의 비리나 잘못 행해지고 있는 사업들을 비판하는 경우이다. 본지의
경우도, 교회가 바른 길로 가지 못하는 모습들을 종종 적나라하게
지적할 때가 있었다. 실은 이 때, 지적 받는 자 못지 않은 아픔이
지적하는 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교계 언론이 '교회 정화(淨化)의 기능'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싶다면
교회의 잘못이나 오류를 지적하여 들추어내고 이것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교회 전체를 위한 일이며 진리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언제든지 제약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 해당 교회에는 소위 '덕이 안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교회의
부끄러운 부분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못을
지적 받은 당사자는 말 그대로 매장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명예를 생명처럼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교역자들에 대한
시시비비는 그 개인에게 무엇보다도 큰 상처를 준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도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는
말씀이 있다. 물론 이 말씀을 해석하기에 따라서 무엇이 '선한 말'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아무튼 함께 교회 된 자로서 지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 언론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기사를 '소설'처럼
써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울의 J 교회 아무개 목사는…" 이런
식이다. 기독 언론의 최선이 과연 이것뿐인가 싶다. 정작 감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김홍도 목사
파문 때만 하여도 기독 언론들은 일제히 정작 보여주어야 할 부분을
감추고 말았다. 일반 저널처럼 지킬 것 다 지키면서 하는 것만이 프로다운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언론으로서 보장되어야 할 부분이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이것이 기독 언론인들로부터 자꾸 프로 의식을 빼앗은 것은 아닌지 의문시된다.
기독 언론은 이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전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언론은 힘을 가져야 하고, '독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는 자가 아닌, 독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계도자로서의
언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면 차라리 일반 언론들처럼
완벽한 프로 정신에 입각하여 독자 중심의 품격 있는 신문을 만들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기독 언론이 교회의 권위 위에 서서 해방구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하는 일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독 언론은 발행 주체로부터 편집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기사를 작성하고 이를 편집해 내는 과정에서 절대로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면서도 빗나가지 않고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유지하기 위해 신학적으로 철저히 무장된 사람을 세워야 한다. 내용과 기술이 다 함께 갖추어진 사람이 편집권을 쥐고 있어야 한다. 기독 언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위해 역시 스스로 담대해 지는 것, 이것이 오늘날 기독 언론에게 주어진 커다란 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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