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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29

 

 

 



 

 

■커버논단

이김과 짐에 대하여

 

그림-1오늘날 '스포츠'는 세계공통어가 되었다. 냉전의 시대에도 올림픽이라는 전지구적 스포츠 무대에서는 화합과 단결이 떳떳하게 선언되었고, 종교와 이념의 차이로 반목하던 국가들도 스포츠를 통해 서로의 기량을 겨루는데 있어서는 정정당당하게 맞선다.

그런 연유일까.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세계적인 스포츠 무대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월드컵, 세계 육상 선수권대회나 세계 체조 선수권대회와 같은 각종 선수권대회, 동계올림픽, 장애인 올림픽 등. 뿐만 아니라 국내적 스포츠 상황도 가히 '홍수'라 할 만 하다. 평화를 소망하는 인류가 만들어낸 스포츠의 홍수.

 

하나님의 선물인가 사탄의 노리개인가

우리의 대뇌 속에 운동신경을 포함하고 있어서 누구나 스포츠를 즐길 수 있고, 예술이나 과학 같은 다른 분야들처럼 재능을 타고나서, 또는 계속적인 훈련을 통해 그 능력을 배가하여 자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계획하신 일임이 분명하다. 인간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데 그 의의가 있다면 스포츠도 분명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이겨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붉은 악마들'을 보면 그들의 이름대로 과연 '악마적'이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민족애가 끓거나 정열이 느껴지기보다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격렬한 몸싸움 끝에 일본 선수와 뒤엉켜 넘어진 후에 묘한 웃음을 짓는 그 한국 선수의 얼굴 속에서, 골을 내주고 망연자실해하는 일본인들이나 또 대조적으로 마치 조롱이나 하듯이 함성을 질러대며 깃발을 흔드는 한국인들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스포츠라는 것을 인간에게 주셔서 서로 싸움을 붙이시는지 모르겠다'는 속 불편한 의심이 든다. 그 경기 속에서 그리고 관중들 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이겨야만 하는 게임(?)

그림-2그렇다면 왜 스포츠가 본래 드러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은 벗어버리고 '악마의 탈'을 쓰게 되었을까.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스포츠에 파고들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인간의 왜곡된 경쟁심리요, 또 하나는 돈, 즉 이 시대를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다.

오늘날 스포츠가 나라와 나라의 대결이 된 모습을, 민족간·지역간의 미묘한 대립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얼마 전 월드컵 예선전만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한국이 승리했을 때, 5천의 붉은 악마들이 5만의 일본 관중들과의 외로운 전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한국은 감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경기장에서 땀흘리며 뛰어다닌 선수들이야 어쨌건 그 경기는 일본에 대한 한국의 통쾌한 승리였고, 일본은 무참히 패배했다. 모르긴 해도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원한의 반은 갚았을 승리였다. 그래서 그 경기는 더욱 '이겨야만 하는 게임'이었다.

이기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은 악마적 속성이다. 인간의 경쟁의식이 그의 교만함을 입으면 엉뚱하게도 하나님께 대적하는 결과를 낳는다. 사탄은 교만한 인간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명예와 부귀를 원하는 인간에게 그것들을 모두 주고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 이름을 모욕하라고 종용한다. 사탄의 이러한 간교함이 스포츠를 통해 나타남을 역사 속에서는 몰론이고 오늘날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김과 짐에 대하여, 다윗과 벤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스포츠는 아니지만 승부에 임하는 자세의 중요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골리앗은 승승장구했다. 어디를 가든 그를 대적할 만한 적수는 없었기에 그는 결국 너무도 교만해진 나머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기에 이른다. 반면에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려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나아간 것이 아니라 모욕받는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세우기 위해 나아갔다. 때문에 다윗이 승리했을 때 이스라엘 군대는 물론이고 적군까지도 다윗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움 중에 볼 수 있었다.

여러분은 그 유명한 영화 '벤허'를 기억할 것이다. 주인공 벤허가 전차경주에 출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경주에 승리해서 월계관을 타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다. 채찍을 쓰지 않아도 네 마리의 말들이 일사분란하게 바람처럼 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의 원수이자 가장 무서운 적수인 메살라처럼 바퀴에 톱니를 장치하는 비열한 수단을 쓰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피를 보는 원수갚음이 아닌 정정당당한 복수를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방법을 벤허가 보여준 것이다. 그가 출전을 앞두고 망토를 둘러쓴 채 고개숙여 기도하는 장면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스포츠는 '이기는 것'이 아닌 '겨루는 것'과 '발휘하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 겨룸을 통해 나의 능력을 확인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면 '이김'과 '짐'에 상관없이 스포츠를 누릴 수 있지 안을까? 선(善)한 경쟁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스포츠를 주신 한 뜻일 것이다.

 

자본이라는 쇠고랑에 메인 스포츠

오늘날 자본의 논리는 만인을 지배한다. 돈이 있어야 산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돈은 많이 있을수록 좋다. 돈은 힘이다. 과연 이런 논리는 스포츠를 흉물스런 돈놀이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오늘날 돈이 오가지 않는 스포츠는 얼마나 될까. 또 스포츠는 바로 그 자체로서 상품이다. 이윤을 창출해 낼 수 있는 무한한 영역을 제공하는 금광인 셈이다. 이제 자본의 논리를 신봉하는 인류는 스포츠를 가만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싸워라. 이겨라. Show me the money!

그림-4프로농구의 스타들에게는 몇백 억대의 연봉을 지급된다. 열심히 싸워서 승리를 안겨주고 대중의 인기를 모으는 스타의 자리를 지켜줄 것을 전제로. 스타는 바로 돈이다. 무엇하나 스포츠와 선수를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가난한 아마추어로 남든지 아니면 어떻게든 이겨서 자본의 이목을 받을 수 있는 프로가 되든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포츠맨 정신은 사라지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아예 애초부터 없는 것인지, 아니면 보기 어려운 것인지는 몰라도….

스포츠가 자본 논리의 지배를 받는 것은 '금메달'과 '프로제도' '상업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들 모두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만, 오늘날 이 왜곡된 현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최고만을 인정하는 자본의 논리는 금메달의 가치를 '하늘'에 메달아 놓았다. 금메달을 향해 달리는 수많은 스포츠맨들은 오로지 정상만을 향해 달리기 때문에 오늘날 그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다른 선수들은 안중에도 없다. 하나님의 형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로봇이 되어버렸다.

프로정신 역시 최고 신드롬의 아들이다. 오늘 코트를 휘젓고 다니는 수많은 프로스포츠 선수들은 관객의 열광에 쇼로 보답하는 광대들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중의 인기를 모으는 소위 스타 플레이어는 늘상 그의 몸값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그의 그늘에 가린 수많은 후보 선수들과 아마추어 선수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질 못한다.

상업주의는 어디가나 말썽이다. 화폐의 가치와 교환의 위대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돈에 미친 사람들의 죄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제 스포츠는 연예계 못지 않은 대중적 인기상품이다. 상업주의는 이것을 놓치지 않는다. 더 재미있고 자극적인, 더 멋있고 매력있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야한다. 조작·과장·속임수가 개입하고, 심지어 건전한 스포츠맨쉽까지도 멋지게 포장을 하면 대중을 감동의 물결로 몰아넣으면서 돈을 챙길 수 있으니 스포츠는 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복둥이다.

 

의문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스포츠가 기본적으로 '이김'과 '짐'을 전제로 한다면, 또 인간의 본성으로서 경쟁심리, 즉 이기는 것을 원하는 그 성품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라면 앞서 지적한 왜곡된 경쟁심리와 자본의 논리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정죄 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의문이 여기에 이르면 스포츠의 왜곡을 무조건 '사탄의 짓이다'라고 치부하기에는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다. 앞에서처럼 스포츠의 왜곡된 일면들을 밝히다가도 문득 벽에 부딪친다. 월드컵 예선전에서 한국팀이 이기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해태 프로야구팀이 이겨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즉 나 자신도 민족주의와 지역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도 사람이니 당연하다 싶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 글을 통해 시원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스포츠는 우상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무조건 열광하고 그것을 즐기기엔 위험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배척하고 싫어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그림-3이어 '인종·종교·사상을 뛰어넘어 희망을 전해주는 전령으로서의 스포츠, 정말 가능한가?' '스포츠, 완벽한 공의를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들이 잇따른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시원한 답을 제시되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그 답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들이 스포츠를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분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길을 발견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글 : 강정룡 기자(feel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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