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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

강해설교 연재 2 : 요한계시록 2장 1절 ㅡ 3장 22절

우리 주님이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신 글 가운데 두 번째는 서머나(Smyrna) 지역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였다. 이 교회의 특성은 한마디로 '핍박받는 교회(Persecuted church)'라고 말할 수 있다.

서머나 도시

서머나 도시는 에베소 북쪽으로 40km 위에 있는 도시로, 에게해의 미항으로 알려진 살기 좋은 곳이었다. 또한 당 지배국이었던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 있는 서머나 교회는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때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교회에는 폴리갑이라는 유명한 감독이 있었는데, 그의 순교 이야기는 유명하다. 폴리갑은 86세의 나이로 화형당하면서, "86년 동안 나를 한 번도 배신하지 않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이 앞에 놓였다 해서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하고, "육체를 죽일 수는 있지만 영혼은 죽이지 못할 이에게 주(Lord)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다. 또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인생에게는 반드시 영원한 형벌과 심판이 있을 것"을 전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빈곤과 굶주림과 투옥과 때로는 사나운 짐승이나 불에 태워 죽임당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대를 살아가는 것과 고난·핍박은 늘 함께 고려되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서머나 교회에 편지하시는 주님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나타나신다. 주님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현재의 고통을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을 때, 창조주로서, 그리고 구속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특별히 주님은 창조주로서의 위엄과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고난의 주님을 보이심으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신다.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핍박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게될 때,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핍박과, 그로 인한 고난에서 속히, 그리고 쉽게 벗어나는 것이라 말할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단정적일까? 그렇지만 사실 우리가 내 자신에게서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것은 고난에서 조금이라도 일찍 벗어나기 위해 온 힘(때로는 편법까지라도)을 다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은 핍박 중에 고난 당하는 성도들을 찾아오사 위로하시되, 그 고난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다.

물론 고난의 성격이 자신의 실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인한 것이기에 독특하다(나는 이 부분에서 서머나 교회의 생으로서 성도들의 신앙을 부러워하고 있다).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시고, 그런 유의 고난을 두려워 하지 않도록 하신다. 그리고 위로의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면하신다. 이 권면을 풀어 보면, "죽을 힘을 다해, 죽을 때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충성하라"는 것으로 들린다.

 

고난이 가져올 두가지 유익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점을 깨닫게 된다. 첫째는, 분명히 표현하지는 않으셨으나,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이러한 핍박과 고난으로 어떤 유익을 얻게될 것인지를 알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말하기를, "고난이 다 지난 후에 있을 유익이 클 것이다" 또는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에게 "하나님이 크게 쓰시려고 그러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고난이 주는 아픔을 경솔히 다루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십상이지만(그래서 주님은 이런 유의 가벼운 표현을 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주를 바라보게 하시고, 오히려 죽도록 충성하라고 요청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가져온 결과를 생각해 볼 때 성도들의 고난도 역시 성도들 자신에게 뿐 아니라 주의 백성을 모으는 통로로 구원의 도구가 될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갖가지 고난을 성도들이 받게되지만 낙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보배되신 주님이 드러나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린도후서4:7-15).

둘째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요함이 어떠함을 확신하도록 하신 것이다. "나는 에수님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의 생활에서는 돈 만원을 손해보지 않으려고 말싸움과 몸싸움도 서슴치 않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요는 땅에 곤두박질 치고만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한발자욱 앞에 둔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해도 좋을 복음을 소개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요로움 안에서 생을 아름답게 바라볼 힘을 주고 계시며, 비겁하지 않을 지혜를 주고 계신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요를 드러낼 기회를 얼마나 얻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는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굽어질대로 굽어지고, 냄새날대로 냄새가 진동하는 우리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요를 드러내기 그리 어렵지 않다는 자긍심을 갖자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남을 위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생각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조그마한 돈과 시간과 수고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요를 쉽게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다. 아니, 감동시킬 수 있다. 자동차 차선과 신호를 지키는 아름다움에서 우리의 가진 달란트를 나누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매일 하늘로부터 부여받고 있음을 본다.

 

고난 중의 딜레마

다음으로는 핍박과 고난 중에 성도들이 더 큰 어려움에 빠뜨리는 것 한가지를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는 핍박과 고난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성도들 중에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수로 또는 부덕으로 그와같은 고난이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러한 표현이 이웃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한다거나, 하나님께 욕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우회적 표현으로서 자기 내면에서는 그 고난의 실체를 알고 주님 안에서 싸워나가는 분들도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와는 달리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대로 " 믿는 사람이 왜 그런 어려움을 당하느냐?", "회개해야 할 것이 많은가 봐!", "안 믿는 사람에게 덕이 되지 않겠구먼" 등의 말에 미리 배수진을 치면서, 겉으로는 자신의 약함으로 그리된 것으로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분을 이기지 못해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고난이 자신의 실수로 온 것이라면 감당하기는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라 말함으로 신앙인의 겸손을 드러내면서도 그 겸손의 허위성으로 근본의 의문, "이 고통은 어디서 온 것인가?",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왔는가?" 하는 것이 자신을 계속 괴롭히는 가운데 더 힘든 싸움을 하는 분들을 많이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이 서머나 교회가 당하는 핍박이 어디서 온 것과 그 핍박이 가져온 환난과 궁핍함을 아신다고 하신 말씀이 갖는 위력을 맞보아 알게된다.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 말씀인지….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이보다 신선한 물줄기가 또 있을까? 서머나 교회가 당하는 핍박이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집단으로서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분명히 드러내신다. 사단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세력에 의해 온 고난임을 분별하게 하심으로 성도들이 지금 영적 전쟁에 있음을 보게 하시고, 이 싸움의 장수는 우리 주 예수이심과 이 싸움이 서머나 교회 성도들과 집단 싸움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게 하신 것이다. 이로서 더욱 하나님을 의존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촉구하실 뿐아니라, 더 나아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함께 다스리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신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갖가지 유혹과 고난과 핍박으로부터 자주 실패하는 것은 어디 있는 것일까? 이 싸움을 개인전으로 여기거나, 집단 싸움 정도로 보고 마구잡이로 덤비는데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과 고난과 핍박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속한 싸움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워야할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게발하기 위하심이고,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부요하심을 이웃에게 알리시기 위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신의 성품에 참예함은 멀리있는 것이다. 생활 가운데 자주 만나게되는 하나님께 속한 싸움에 있는 것이다.

 

주님의 생명의 부요하심

끝으로, 주 예수님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면하심으로 죽음을 뛰어넘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능력이 어떠함을 보이도록 하신다. 이는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심이 아니며, 악에 받쳐서 죽음을 내놓으라는 요구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새 생명의 근본이 어떠함을 보이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주님의 요구는 도대체 받아들이기 힘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주님은 생명의 면류관이 있음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주는 그 큰 능력이 어떠한 것임을 다시 생각하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핍박으로 인하여 궁핍한 성도들에게 실상은 부요한 자들이라고 하심으로,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함께 나눈 자들이 많음을 생각하도록 하신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부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도록 할 뿐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돈의 기준을 따라 움직이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관점을 가지고 움직이도록 권면하고 계시는 것이다. 돈의 기준으로 움직이면 쌓을 수 없는 부요함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신비 가운데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는 관계 속에서 익어져가는 성숙에서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돈으로 평가되는 목표가 우선시 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부요함까지 돈으로 평가되도록 강요받는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쌓을 수 있는 부요는 무엇인가? 빗겨갈 수도 있는 고난을 자청하며 주님께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왜 이글을 쓰는데 오랜동안 망설이고 있었을까? 그것은 교회의 활동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표류하는 곳에서 오랜동안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고난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피해 온 삶을 돌아보면서 괴로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핍박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정한 핍박을 받게될 교회를 찾아오시고 격려하시는 것을 본다. 어느덧 습관이 되어버린 편안함으로 인해 너무 멀리있는 나를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작아진 내 모습으로 이 말씀을 담기에는 무척 힘겨웠음을 고백한다.

이준행 목사 / 광주 초록빛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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