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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8

 

 

 

 

 

 

  

 


그 동안 냉대를 받아오던 점술이 새로운 예언으로 부각되고 있으며, 사회의 변두리에서 맴돌고 있던 점쟁이들이 이제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른 바 점술을 통한 예언서들까지 쏟아져 나와, 민심을 흔들고 있다.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점술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그것들과 함께 휩쓸려 가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점술에 대한 성경적 입장과 대안을 찾아보려고 한다.

점쟁이나 무당은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세계관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점술이나 주술은 단순한 심리적 기술이 아니라, 그 배후에 어떤 신념과 신앙을 깔고 있다. 점술과 주술이 가장 발달했던 고대 근동아시아의 세계를 보면 점술과 주술은 그들의 세계관, 신화, 현실정치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방인들의 정신세계에 있어서, 점술과 주술의 위치를 알아보자. 점술은 단지 한 개인의 미래를 미리 알아보거나, 액땜을 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술로 존재하지 않는다. 점술이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예언으로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주술적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 즉, 점술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밑바닥 속에는 공통적인 세계관이 있다. 이 세계관이란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현재의 질서로 만들어졌으며, 현세가 초자연적인 세계와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해 설명해준다. 이방인들의 세계관은 그들의 신화에 담겨있다. 즉, 신화를 통하여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을 설명해준다. 이 신화 속에는 어떤 신이 가장 힘센 신이며, 신들의 목적과 의도가 어디에 있으며, 그의 주술적인 능력 안에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기본적인 설명이 담겨져 있다. 점술과 주술은 초자연적인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체적으로 이어주며, 신들의 세계의 힘을 빌려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구약 성경의 배경을 이루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세계관과 신화와 주술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이런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방인들의 점술과 주술을 비판하고 있으며, 이것들이 어떻게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교묘하게 선민 사회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지 경고한다. 먼저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세계관을 살펴보면, 두 가지 점이 두드러진다. 첫째로 인생의 모든 일들과 국면들은 독자적으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영계와 현세를 포함한 이 세상 전체와 철저히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거대한 인과관계로 이어져 있고, 또한 인생사의 일들은 운명론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볼 때에는 자연스러운 현상도 그들에게는 총체적인 세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로 비쳤다. 둘째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자연과 초자연 세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신들은 인생사에 직접 개입할 뿐 아니라, 아주 밀접하게 개입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모든 역사적인 사건이나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 배후에는 신들의 뜻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정들을 파악하기 위해 아주 전문적인 술사들과 점쟁이들을 궁궐에서 지원하며 돌보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운명론적인 세계관과 주술론적인 세계관은 그들의 창조신화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바벨론의 창조 신화를 보면, 신들은 주로 마술과 주술로써 상대방을 묶고 죽이며, 권력다툼을 하고, 이 세상을 만들며 유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런 세계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점술기술을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점술과 주술에 대한 성경의 태도를 살필 때, 고대 근동아시아의 전체적인 세계관과 신화와 점술의 배경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경 저자들은 그들의 점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던 시대에 어떤 유형의 점쟁이들과 술법들이 있었는지 가장 종합적으로 명쾌하게 말해주는 본문은 신명기 18장이다. 이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압 동편에서 마지막으로 율법을 강해하면서, 앞으로 가나안 당에서 부딪힐 영적인 혼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넓은 문맥을 보면,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그들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바르게 살도록 그들에게 '왕의 규례'(신17:14)와 '제사장의 규례'(신18:1-8)와 '선지자의 규례'(신18:9-22)를 주신다. 마지막 규례에는 가나안 토착 점쟁이들과 그 점술의 유형 및 특징이 제시되고 있다(신18:9-14). 이방예언의 유형과 그 영성을 다루는 이 단락은 "네가 그 당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라"(14절)로 마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이미 그 땅에 토착화 된 가나안 종교와 그 영매들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미리 경고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먼저 이들이 행위는 '가증한 것'(to' abot)으로 묘사된다. 신명기 7장 26절에서는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당할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극히 꺼리다'는 '가증한 것으로 여기다'의 뜻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은 곧 진멸당할 것이다. 가나안 백성들이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진멸되고 쫓겨 나가는 이유는 그들의 가증한 종교적 행위 때문이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도 후에 바로 가나안의 이 가증한 행위를 따랐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앗시리아의 포로로 잡혀간다(왕하17장). 이후에 남쪽 유다도 열국의 가증한 행위를 따랐다는 이유 때문에 약속의 땅을 잃고 바벨론으로 붙들려 간다(왕하 21장). 이어 모세는 가나안 종교의 가증한 종교행위들과 그 전문 종교 기술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모세를 통해 직접적으로 받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죄성과 부패성 때문에, 거짓 신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실 참된 말씀과 인간이 만들어 낼 말을 비교하며 대조한다. 여기에 가나안 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는 그 영성을 기본적으로 점술과 마술과 강령술에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술법이 아홉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이들을 소개한 후, 모세는 신학적인 정리를 해 준다(12-14절).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고 말한다(12절). 이스라엘이 장차 포로로 잡혀 간다면, 바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있어서 이교적인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가나안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 했다(13절). 이 '온전함'은 도덕적·윤리적·종교적 차원을 다 포함하고 있다(시 19:7-14).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들과는 달리,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높은 윤리적 수준을 추구하며 살도록 부름 받았다. 주님은 명백히 말씀하신다.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14절)

이방 세계의 주술사들과 점쟁이들의 영향력은 너무나 넓고 깊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에는 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였다. 사실 참선지자들은 주로 재앙과 경고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평안과 형통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 중 그 첫 번째는 발람이다(민 22-24). 발람은 고대의 유명한 술사였다. 그가 축복하고 저주하는 데 따라 한 나라가 복을 받기도 하며 저주를 받기도 하는 강력한 주술사였다. 그는 한때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이방의 주술사요 점쟁이다. 발람은 이방 술사들과 같이 계시를 얻기 위해 점술을 사용한다(24:1 ; 23:3,5). 그는 이러한 점술 형태를 주로 사용했으나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함으로써, 비록 참선지자는 아니지만 참예언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고 그의 뜻을 구했으며 따랐고, 하나님이 허락하기 전에는 발람의 요청에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신은 그에게 임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알고, 그는 더 이상 점술을 사용하지 않았다(24:1). 그렇지만 그의 본색은 변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감동을 체험하였지만,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었고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았다"(벧후 2:14-15).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옛 본색을 드러낸다. 그는 이스라엘로 방탕한 바알브올을 숭배하게 한다(민 31:15). 결국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민 31:8). 두 번째는 시드기야와 400여명의 선지자들이다(왕상 22장).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끼리 싸우는 장명 중에서 가장 치열한 장면 중 하나인, 미가야와 기드기야의 대결에서, 아합과 밀착된 선지자 400여명과 시드기야는 높은 사회적 위치를 누리면서, 왕이 기뻐하는 긴탁의 말씀을 '예' 혹은 '아니요'의 형태로 주고 있다. 이들은 신탁을 전달할 때 전통적인 선지자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바벨론이나 가나안의 선지자처럼 쉽게 '예' 혹은 '아니요' 만으로 결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왕에게 늘 길한 것만 예언하였다. 이들은 이미 사회 개혁자로서의 선지자의 본분은 상실하고, 왕과 귀족이라는 특정 계층과 연관되어 예언을 하고 있다. 시드기야와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고, 그들은 상징적인 행동까지 취했으며, 나아가 시드기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신'으로 예언하고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모두 미혹의 영에 속은 자들이었다(22절). 미혹의 영은 속이며, 그들은 속았다. 그러나 그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기 때문에 확신에 차서 거짓예언을 하였다. 시드기야의 예언은 속이는 영으로부터 충동질을 받은 것이었다. 세 번째는 평화에 대해 거짓 예언을 했던 하나냐이다. 유다의 마지막 왕들 중 시드기야가 즉위한 후 4년 5개월(주전 593/4)에 기브온 출신,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구원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2절). 또한 그는 바벨론으로 옮겨간 주님 집의 모든 기구들이 '두 해가 차기 전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며, 나아가 '유다왕 여고니야와 모든 포로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나냐의 예언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 동안 예언한 것과 정반대였다. 하나냐의 예언은 선례에 비추어 볼 때, 참된 예언이 아니었다. 이전 선지자들은 심판을 예언하였다. 결코 구원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물론 이사야와 호세아는 구원을 전하기도 했으나(사 7:4-9 : 호 14:2-9), 정경 선지자들은 대부분 심판을 전해따. 그들은 '값싼 낙관주의'를 팔아먹지 않았다. 이 때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멍에를 취하여 꺾어 버린다(10절). 그리고 자신의 상징적 행동에 대해, 주님께서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반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같이 꺽어 버리라"고 해석해 준다(11절).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냐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네가 나무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멍에를 만들었느니라"(13절). 끝으로 방자히 말한 선지자는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16절). 이 대결은 "선지자 하나냔가 그 해 칠 월에 죽었더라"고 끝낸다(17절). 마지막으로 에스겔 시대의 사이비 여자 예언자들이다(겔 13:17-23). 여선지자들은 공식적인 위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겔 13장에 등장하는 예언하는 여자들은 참선지자로 활약한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먼저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자'로 소개된다(17절). 그들은 의인을 근심하게 하며,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게 하였다(13:21-23). 이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사람들의 머리 위에 두기 위해 만든다(18절). 게다가 이들은 돈을 바라고 예언한다.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 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낸다"(13:19). 여기의 보리와 떡은 주술에 사용되는 재료였던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거짓 예언을 하는 자들로 여겨진다(삼상 9:7).


성서적인 대안

하나님께서 보내실 선지자와 예언


1)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 (신 18:18)

가나안의 점쟁이요, 마술사와 주술사와 신들린 자와 '본 것도 없이 방자히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 대신, 주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주실 것이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신 18:18). 여기에 있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는 일차적으로 선지자 직분을 말한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새로운 선지자를 보내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선지자 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약속은 궁극적으로 '모세보다 더 큰 선지자'를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대, 사람들은 '이는 참으로 오실 그 선지자라'(요 6:14).

2) 우리에게 선지자가 필요한 이유 (신 18:16-17)

우리에게 선지자가 필요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와 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신 18:16). 하나님께서 호렙산에 강립하시고, 말씀을 주셨을 때, 그들은 감당할 수 없어서,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중보자가 필요하다. 주님은 선지자를 중보자로 세우시고, 자신의 말씀을 주실 것이다. 모세가 죽은 이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를 통하여 계속 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주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받은 자는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7-8)

3) 천상의 총회에 참석한 선지자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예언은 천상의 총회에 선지자들이 들어가서 직접 본 것이라고 소개한다. 미가야는 하나님의 총회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어전에서 이루어지는 회의에 참석하며, 하나님의 뜻을 파악한다(왕하 20:17). 거짓 선지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은 적도 없이 '자기 마음으로 나오는 거짓 묵시'를 전하지만(렘 14:14),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총회에 선 자이다(23:18,22).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23:18,22). 거짓 선지자들이 자기 마음에서 지어낸 말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참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보았기 때문에 진실된 예언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백성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마술사와 주술사와는 근본적으로 달리, 참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또한 왕의 뜻을 늘 '예' 혹은 '아니오'로 대답하는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대사와 전령과 대변자로 파송받고 일한다.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관심이 없는 주술사와 마술사와는 달리 참선지자들은 사회 개혁자로서, 주님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사회의 불의를 책망하고 공평과 정의가 선민사회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한다. 끝으로 성경적 선지자들은 도덕적 기준에 호소하여 그들의 대적들의 말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을 증거한다 (렘 14:1 ; 23:10-14 ; 29:21-23 ; 겔 13:21-22 ; 미 2:11 ; 마 7:15:20 ; 딤전 3:13-18 ; 딤후 3:6 ; 딛 1:6-9 ; 약 3:13-18). 결국은 열매로 그 나무를 분간할 수 있을 뿐이다.
점, 참된 계시 없이 형성된 세계관. 우리는 위에서 이방의 점술과 주술과 강신술이 성경의 신앙과 양립할 수 없음을 보았다. 그들의 점술과 주술은 하나님의 참된 계시 없이 형성된 세계관과 신화에 근거하며, 궁극적으로는 위정자들의 현실 정책을 뒷받침하며, 백성들에게는 일시적인 평안과 성공과 번영을 달콤하게 약속하는 조작임을 보았다. 또한 이들의 점술 배후에는 주술적이며 운명론적인 세계관이 깊이 깔려 있음도 보았다. 이방의 점쟁이들과 마술사들은 참된 영계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독점하기 때문에, 결국 이 세상에 더욱 큰 어두움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기자들은 종교적인 영역에서 가장 경계할 사항으로 이방의 점술과 주술과 상신술을 꼽고 있다(신 18). 주님은 이런 일들을 가증한 일로 여기시며, 우리로 하여금 극히 꺼리도록 당부하신다. 겉으로 볼 때에는 점술과 주술은 자체적인 논리와 통계가 있고, 뭔가를 맞추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헛된 것이며 우리를 미혹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점술과 성경의 예언을 볼 때, 거짓과 진실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주신 진리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그 안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

글 : 김정우 / 총신대 신대원 구약학 교수
발췌 : 1998.11.<빛과 소금>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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