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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2

 

 

 

 

 

 

■Sight

인간중심철학의침투를경계하라!

인간의 전적(全的)타락 vs 몬테소리 교육법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에 인류는 그 동안 수많은 답을 제시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두루 지지해 온 주장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는데,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과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이 그것이다.

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을 선으로 보는 것이다. 맹자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본래 선에 대한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고 하여 거기에서 우러나는 마음씨를 사단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의 정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 보고, '인간 본래의 성질은 악하며, 선하다고 하는 것은 후천적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주장한다. 두 주장은 인간을 낙관론으로 보느냐, 비관론으로 보느냐 하는 커다란 두 줄기 사상과 맞물려 지금까지도 논쟁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순자의 성악설을 깊이 연구해 보면 뜻밖에 독특한 의미가 발견된다. 사실 성악설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성선설에 대립하여 등장한 이론이 아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성악설의 근본적인 주장은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악하다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너무나도 악을 행하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성악설조차도 '인간이 끊임없는 노력과 정진을 통해 성인 군자에 이를 수 있다'고 하여, 인간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에게 일말의 가능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인간에게 가치를 둔다

그 옛날,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의 인본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맹자도 순자도 역시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기에, 인간에게 애써 얼마간의 '가능성'을 부여하려 든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 나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생존을 위해 그나마 어떤 최소한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이를 보장받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다. 자신이 전적으로 악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이것이 '인간 중심 철학'의 치명적 한계이다.

성경은 그 맨 첫 구절부터 신본주의로 시작한다. 여기에 반항하는 인간의 역사가 곧이어 뒤따르고, 신본주의 가치관은 인간에 의해 인본주의적 가치관으로 변질되었다. 그것이 타락이다. 성경은 인본주의의 극치를 바벨탑 사건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제 하나님 중심 학문은 찾기 힘들다. 인간 중심 학문이, 나 중심의 신앙이 온 세상을 휩쓸고 있다. 신학에 있어서도 이미 이단으로 정죄 된 '알미니우스'의 실용적·인간 중심적 논리가 버젓이 정통 신학의 자리를 차지해 가고 있다. 이렇게 신본주의 정통에 개입한 실용주의와 인본주의는 알게 모르게 진리를 왜곡·오염시키고 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것'을 설교하고 있다. 신학교에서부터 그것을 가르친다. 왜냐, 체험주의와 기복신앙의 입맛을 맞춰야 하기에. 그나마 조금 깨어 있다는 교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청년이 미래다', '주일학교부터 살려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그들에게 목회의 초점을 맞추고 갖가지 서비스 제공에 바쁘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이미 하나님의 관심사는 안중에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편에서 피조물인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위치를 확보한 뒤에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조금 더 높은 곳에 모셔 두려 하는 것.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높여 드릴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실제로는 자신을 높이고 있으면서…. 자신의 위치를 그토록 쉽게 망각하는 것이, 여전히 교만한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고 슬픈 모습이다.

 

인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이렇게 되면 처음 제시했던 질문, 곧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대답은 인간의 지혜와 학설을 끌어와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알게 된다. 인간 아닌 어떤 다른 존재가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인간은 이러한 존재이다."라며 정의해 주면 좋을 터인데, 불행히도 이 피조계에 인간보다 위대한 피조물은 없다. 차라리 월등한 지적 수준의 외계인이 나타나기까지 기다리겠다면 몰라도, 우리는 결국 다시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신본주의로 눈을 돌려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

성경은 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상태인가를 말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지금 상태를 죄에 빠져 '대책이 없는 상태'라고 가르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아무리 성경 말씀이라지만, 그 표현이 너무나도 단호하고 직설적이다. 극단적인 성악설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 여기서 '전적'이라는 의미는 100%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말의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 안타깝지만 그것이 부패한 우리 인간의 상태이다. 그야말로 '악하고 악한' 존재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상태는 이러하다. 죄로 인해 그 본성이 타락하여 '완전히 더럽혀진' 인간인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몬테소리 교육법'의 기본 사상이 문제다

이러한 기초 지식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자. 수많은 바벨탑 공사 현장이 눈앞에 보일 것이다. 앞에서 맹자가 소개한 '몬테소리 교육법'은 이탈리아의 의사이자 교육가인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1870∼1952)에 의해 창안된 교육 방법이다. 그녀는 성선설에 기초하여,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이른바 순수 상태인 아이를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과학적'인 교육학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녀는 관찰에 의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고 아무 간섭이 없는 환경에 놓이기만 한다면 어린이 내부에 갖추어져 있는 생명(?)이 스스로 발전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어린이는 자유로운 활동을 경험함으로써 자발성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교육법은 오늘날 전세계 수많은 '유아교육기관'과 '특수교육'에서 실효를 거두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출발부터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을 두고 있다는 점을 볼 때, 몬테소리 교육법은 성경적 시각으로 그 위험성을 점검 받을 필요가 있다. 어린이가 날 때부터 일정한 학습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개발되고 발전한다는 논리는, 가만 보면 인본주의 철학의 극치인 '뉴에이지 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이 주일학교와 어린이 선교원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주된 교육 방침으로 채택 된지 이미 오래다.

물론 몬테소리 교육 방식 자체는 효과적일 수 있다. 단순히 외적 환경만을 갖추고 학습의 내용·방향 설정에는 간섭하지 않는 방임적 교육론이 아니라, 부수 학습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잘 준비된 학습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바탕이 되고 있는 철학이다. 몬테소리의 주장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일면 타당하고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주변과 현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몬테소리 교육법의 철학이 하나님의 교육 방침과 어긋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과감히 그것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원리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교육 방침은 어떠할까. 몬테소리 교육법을 허용할 수 있을까.

 

진정한 교육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9∼10)"

참 지혜, 참 교육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임을 잠언 전체는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그 바른 위치와 관계를 깨달은 자만이 자신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성경이 그것을 매우 분명하게, 자신있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의 온갖 인본주의적인 교육법들은, 그 끝이 결국 허무와 무익과 허탄함에 빠지게 된다. 오늘날 큰 문제는 세계적으로 국가가 교육을 통제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우 교묘한 사탄의 전략일 수 있다. 하나님은 '가정'이라는 제도를 두시고 부모들에게 자녀 교육의 권세와 책임을 주셨다. 물론 국가가 이를 도울 의무가 있으나, 국가는 교육 과정에서 '하나님'을 제거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교육의 원리까지 친히 가르치고 있다. 성경적 교육 방법은 지혜자에게 교훈을 '더하고', 지식자에게 학식을 '더하라'는 것이다. 참된 교육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고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볼 때, 몬테소리 교육법처럼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무조건 신봉하는 교육 원리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단지 그 방법론적 차원에서의 선별적 수용이 가능할 뿐.

<TheVoice>는 이상과 같은 논의를 근거로 하여, '몬테소리 교육법'에 대해 성경을 기준으로 한 재점검 작업을 해 줄 것을 교회에 요청한다. 그래서 몬테소리 교육법의 기저에 '뉴에이지 사상'이 깔려 있고 그것이 실제로 교육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검증된다면, 이를 더 이상 교회에서 무분별하게 수용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신학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교육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되심과, 인간의 지극히 비천한 인간 됨'을 확실히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출발이 잘못된 각종 교육 방법의 종말은, 두고 볼 필요조차 없이 뻔하다.

황희상 기자(pulitzer95@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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