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재채기 같은 글들입니다. 엣취! 전 재채기가 좋습니다. ^^ | |
|
|
재채기 03. 예술의 순수성과 도구화에 대한, 몇몇 규정들이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 ------------------------------------------------ ◎ 연구 목적 예술의 순수성과 도구화에 관련된 여러 가지 토론들이 있었다. 그 중 몇몇 이들이 예술의 순수성에 대해 그 특성과 본질을 정의하여 순수와 비순수를 구분하고 있었고 나는 그러한 구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 이 있다. 어떤 견해들은 토론자가 서로 다른 사람들임에도 공통적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이 얼마나 타당하며 설명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였으며 그 견해대로 순수성을 규정할 시 어떤 오류와 문제점들이 발생하는 지에 대해 논해 보았다.
◎ 순수예술은 대중에게 어필해야 한다? 또 사회적 목적성도 가져선 안된다? 순수예술에 대해 인간의 생활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또 영향을 주지도 않는 독립적인 예술이라고 설명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그 표현에 있어서 예술의 가장 근원적인 기능을 '정서'의 표현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가의 정서를 제대로 어필할 수 있는 예술, 그리고 인간의 삶과 분리되지 않고 밀접한 소재들을 사용하는 예술이 순수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이중섭'씨를 들고 있다. 그는 일상과 밀접한 소재들을 사용하였고 그 정서가 대중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는 그런 예술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조건들을 만족시키고 있는 그의 예술은 순수하다는 결론이었다. 더군다나 순수예술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하였다. "감상자에게 쉽게 어필하는 것. 순수예술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3번 토론실, 문순영님)" 이러한 생각은 더 나아가 사회적 목적을 가져서도 안된다는 조건을 전제로 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에 있어 순수하지 못한 예술이란 사회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도구로서 사용되는 예술을 뜻한다. 즉, 사회를 좀더 정의롭게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작가의 신념을 담아서 사람들에게 같은 행동을 유발하기 위해서 창조된 성격의 것들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작가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정서를 사람들이 친숙하게 생각하는 혹은 새로운 표현양식으로 사람들의 감각의 폭을 넓히는 소재를 바탕으로 창조하는 것이라면 순수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하는 생각이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정서를 좀 더 많이 표현하였느냐? 혹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사상을 좀 더 많이 표현하였느냐에 따라서 순수예술과 비순수 예술로 나누어 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3번 토론실, 남민영님)" 학문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볼 때에 진리라 함은 그 속성이 일반적이고 시대를 뛰어넘는 그것일게다. 위의 견해대로 예술이 단순히 정서를 표현하면 순수예술이고 신념과 사상을 표현하면 비순수 예술이라고 하는 판가름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때의 러시아의 예를 들어 보자. 당시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로마노프 왕조를 혁명을 통해 몰락시키고 이후 2월 혁명, 10월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를 이루었다. 그 후 1920, 3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 승리의 상징을 축제를 통해 표출해낸 바 있습니다. 그러한 축제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메이데이를 꼽을 수 있겠다. 그들의 축제엔 당연히 예술인들의 참여가 있었다. 여기서 그 축제의 의미는 두 가지. 첫째로는 순수한 노동자들의 혁명이 아니라 상부 권력자들의 힘으로 마침내 이루어낸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하부 노동자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축제에 예술이 도구화된 현실이다. 반대로 그야말로 순수하게 그들의 사회주의적 사상을 전위주의적 예술로 표출해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현실적 어려움과 사회주의의 희망찬 미래를 매우 사실적인 모습으로 표현, 새로운 예술 장르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는 이들이다. 물론 이러한 전위예술이 예술의 틀을 가지고 예술성을 규정하고 억압했다는 점은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이러한 전위예술의 틀을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드러내었던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예술을 보건대 전자는 비순수한 것이요, 후자는 순수하다. 왜냐하면 전자는 권력자들의 말그대로 감정이 없는 도구로 전락해버린 예술이며, 후자는 그 사상의 끝이 허무하고 오점이 있었다 할지라도 사상을 표출해내고자 하고 그것을 이루어낸 그 자체는 순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바라볼 때, 위에서 순수성의 잣대로 사용한 정서, 즉 아무런 목적도 사회적 영향력도 없는 정서 그 자체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한가지 이중섭을 예로 들었던 부분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어필을 순수성의 조건이자 바람직한 방향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자. 과연 당시 그의 그림이 지금과 같은 느낌으로 대중을 사로잡고 그들에게 어필했을까? 그러나 사실 당시의 이중섭씨의 말로는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아사(餓死)가 그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한국 미술계에 있어서 한 천재의 그림은 너무 늦게서야 빛을 발한 셈이다. 그렇다면, 위의 견해대로라면 그의 그림이 당시에 순수예술로 평가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과거엔 비순수한 것이며 현재엔 순수한 것이 되는 것이다. 정서의 어필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예술의 순수성을 가른다면 이처럼 시대적 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 공유불가한 예술은 무의미하고 사소하다? 3번 토론실 김남규님은 "향유계급(?)들만의 이데올로기를 양산해내는,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계급이 아닌 사람들에겐 공유의식도 없이 내뱉는 표현은 무의미하고 사소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또한 "예술의 순수성은 지배계급에 종사할 때 훼손된다" 3번 토론실 김남규님의 견해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적 문화비평가들의 생각과 같은 선상에 놓인 듯 하다. 그러나 그의 견해를 종합해볼 때 예술은 '공유가능'해야 순수성을 확보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남긴다. 피카소의 그림은 내가 교육받기 전에는 도무지 이해가지 않고 절절한 감정도 전달되지 않았던 그런 그림이었다. 그러나 미학에 대해 알게 되고 그림에 대해 식견이 있는 이들의 설명을 통해, 즉 교육과 소통과 같은 일들을 통해 예술가의 생각이 전달되었고 예술가와 그 감정을 공유하였던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편 시대에 따라 계급이 구분되고 그에 따른 격차의 존재는 브루주아지들의 출현 시기에 관계없이 늘상 주어져 왔던 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각 계층마다 나름의 전통과 나름의 삶의 모양들을 풀어내는 예술과 문화를 향유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위의 견해라면 여러가지 기준으로 구분을 해놓은 계급이 우리의 현 위치에서 보기에 상위로 보이든 하위에 놓든지 간에 보이든 간에, 또한 각각의 문화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세기의 문화가 모두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이 의견은 문화와 예술이 가지는 정치적 영향력들에 대해 비중을 둔 논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위의 주된 논의만 가지고는 이 같은 오해와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다.
◎ 타영역과 접목되는 순간 예술은 순수성을 훼손한다? 특별히 순수예술의 성격을 논의하면서 수학의 성격에 비유한 이가 있었다. 수학은 순수하고 응용수학은 비순수하다는 견해였다. 이러한 견해에서 비순수는 다른 영역과의 접목 그 순간에 순수성이 박탈된 채 발생한다. 또한 순수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서는 '본래 작가의 감성과 아름다움을 주제로 한다'고 하였다.(3번 토론실, 박은영님) 만약 수학이란 학문이 우주의 법칙을 찾아내고 진리를 찾는 한 접근 방법으로 사용되었다면 그 상태는 매우 순수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학이 어떤 이에게는 암기해야할 문자들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연 그 수학은 순수한 것일까? 한편 응용수학 중 하나로서 통계라는 분야가 있다. 그것은 종종 사회조사에 응용되곤 한다. 이러한 수학이 인간 집단의 여론을 충실하고 정확하게 반영하여 정치에 투영되고 정책에 반영되도록 한다면 그 응용 수학은 비순수한 것일까? 이제 순수의 본질에 대한 반론을 시작해본다. 광주에서 벌어졌던 80년대의 5.18을 '상상'해 보자. 당시 시민들의 고통과 불안, 그 엄청난 공포에 대해 한 예술가가 그림으로 그 처참한 현실을 표현했다고 하자. 그 당시 그 예술가의 감성과 예술가가 가졌던 미에 대한 표출은 사실적일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 처참한 현실을, 그 뜨겁게 흥분된 공포의 의식을 핑크색이나 연노랑색으로 칠하는 것은 죄악으로 여겨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온통 피로 얼룩진 그런 그림, 시체들의 나열들로 표현했다면? 첫 번째 견해대로라면 분명 이 사람은 순수하지 못한 예술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 참여적이고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중 견해 대로라면 이 사람은 순수할 수밖에 없다. 작가의 감성과 아름다움을 지극히 진실하게 표현했으니 말이다.
◎ 아름다운 것은 무조건 도구화라 부를 수 없다? 3번 토론실 송선영님의 견해였다. 예술이 종교의식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도구화라고 명치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그레고리안 성가의 아름다움을 들었다. 그렇다. 음악과 예술 자체는 인간 정신의 고양의 목적을 잘 달성할 때 그것을 접하는 인간은 그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게 되었을 때 시대에 상관없이 일어나는 그 감정들이 그러한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과거 음악과 연주를 남성들만 향유할 수 있었을 시절에, 어떤 음악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후세에까지 이어져 내려와 우리 귀에 들렸을 때 그 감흥이 아름다웠고 풍성했다고 하자. 그런데 알고 보니 실상 그 음악은 부모에 의해 권력과 명예를 위해 거세당한 7-8세 사내아이들이 불러야했던 음악이라면 어떨까? 그 음악이 과연 당시 그것을 불러야했던 주체자의 입장에서 그것이 순수한 것이었을까? 그러한 음악이 교회 내뿐 아니라 종교적 의식에 사용되었다면 조금은 생각이 달라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이 같은 천상의 소리와 같은 음악들이 부패로 점철된 중세 카톨릭 교회에서 하층민들의 귀를 현혹시켜 헌금이라는 목적으로 수탈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면 그 음악은 그 당시 어떤 음악이었을까? 지금 우리는 그 당시의 음악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물론 그 음악은 지금 듣기에도 먼 미래에 듣기에도 무척 아름다웠을 것이다.
◎ 결론 토론들을 살펴볼 때, 예술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목적의식을 갖게 되거나 그러한 표현틀을 띠었다는 것만으로 비순수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드러났다. 또한 정서적으로 아름답고 사상과 정치적 의식과 무관하게 정서적으로 잘 표현되기만 하면 순수하다는 평가도 오늘날의 경향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정서와 사상은 떼어버리기 쉬운 일들일까? 분리가능해서 정서만을 혹은 사상만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점에 있어서 정서와 사상, 그리고 의식과 영혼은 모두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이 천부적으로 받은 능력들과 예술적 가치들을 발현하는 데 있어서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예술이 아닐 때, 즉 그러한 능력들이 대중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왜곡당하고 종국엔 예술가를 대중이나 권력자들의 명령 안에 종속시켜 만들어낸 예술이었을 경우, 예술은 그 순수성을 잃는다고 생각된다. 예술은 예술가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순수성과 비순수성의 구분은 어떠한 일정한 형식틀로는 구분할 수 없다. 어떠한 예술적 형식틀을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다양성에 입각하여 그 형식틀은 같더라도 인간의 사상과 정서, 전통과 의식은 매우 다르게 인지되고 작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인간의 사상은 젊을 때와 연로했을 때가 다름을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사고에 대해 신이 아닌 이상 전부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 추론적 능력과 이성을 가진 능력이 있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바로 예술가의 사고와 정신, 당시의 심리를 헤아리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역사를 탐구하여 총체적이고 통일적으로 설명될만한 증거들을 모으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이루어지는 정의들과 규정들은 수많은 오류와 왜곡을 낳고, 종국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예술에 있어서 그것이 도구화되었다거나 순수하지 못하다고 명명할 수 있는 경우는, 그럴만한 사회 구조와
인식, 또한 동인들이 작용했을 때에 가능하다. 그러한 때에야만 일련의 법칙을 발견한 데 대한 '규정'과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이 학문하는 자들의 접근 자세는 아닌가 생각되는 바이다.† |
|
처음 | 이력서 | 자유게시판 | 희상이가 설이를 만날 때 | voice2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