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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마리


                     본문 : 아모스 2장 6절 ∼ 8절 말씀

그리스도인의 시간 개념은 세상의 방식을 초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용하는 24시간의 계산법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에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베푸신, 하나님의 지혜와 때를 따라 이끄시는 일반적인 은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시간법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3장 7, 8, 15절, 4장 7절에 보면 다윗의 시편이 인용되고 있는데,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3:7∼8,(15)),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히4:7)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3장 13절을 보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얼른 납득이 가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시간 계산법으로는 다윗의 시대와 초대 교회 시대에 시간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다윗의 시대에 기록된 시편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마치 초대 교회 시대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오늘날'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가 실수를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일점일획 모두가 하나님의 참된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히브리서가 틀릴 수가 없습니다.


시간 개념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경륜

어떤 자들, 즉 시간을 중시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은 이것을 많은 사색 속에서 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시간이나 역사를 우선하여 성경을 해석하면 시간의 차이로 하나님의 뜻을 논하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작정, 또는 예정의 뜻이 상실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시편을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를 향하여 무시간적으로 적용한 것은, 시간을 우선시 하기보다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과 구속 언약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경륜적인 형식의 변화는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에는 양과 같은 동물의 죽음을 매번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속죄 사역을 감당하였으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더 이상은 속죄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식의 변화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인간들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실존은 동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인한 속죄 형식의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 앞에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삶이 구약이나 신약에서 무시간적으로 적용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이 신약에 사는 성도에게도 멀리 느껴지지도 않고, 구약 성도의 삶이 신약을 사는 성도에게 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 시대와 동일한 우리의 죄

그리스도인으로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 먼저 언급한 이유는 아모스서에 기록된 북이스라엘의 죄악상이 결코 우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보다 약 2750∼60년 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아모스의 내용을 시간과 기독론만을 중심으로 해석을 하면, 아모스를 좁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어떤 한 구절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부유할 뿐만 아니라 충만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한 구절을 해석하더라도 성경의 전체적인 대의를 중심으로 하며, 기독론 중심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신 의논을 중심으로 해석이 되어져야 합니다. 아모스서를 대하는 우리들은 이것이 예수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거룩한 삶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포하신 내용, 아모스서를 대하시면서 이 죄악들의 근본을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현대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다른 모습을 취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북이스라엘이 저질렀던 죄악의 본질과 동일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죄악이 만연하는 사회는 하나님의 계시인 진리가 막히는 사회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살피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진리가 막힌 사회

이전 설교에 성적으로 타락한 북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았는데 다시 언급하여 살펴보면, 당시의 사회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와 정을 통하는 것이 마치 관례처럼 되어 음욕의 탐닉 속에 빠져든 사회였습니다. 이 아버지와 아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그들의 삶으로 높여야 하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면서 쾌락에 탐닉하였습니다. '한 젊은 여인'은 매춘부로서 아버지와 정을 통하든지 아들과 통하든지 그녀는 문제를 삼지 않았을 것이나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사실은 타락한 인간 본성에 심겨놓은 양심과 그 양심을 밝히는 율법에 근본적으로 어긋남을 부자(父子)가 알면서도 그 죄책감이 그들의 행동에 장애가 되지 않았던 배도적인 사회였습니다. 이런 성적 문화는 성경에서 인간의 죄악으로 부패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동성애만큼이나 타락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런 사회는 그 사회를 유지하는 도덕적 기준이 상실되어 있으며, 개인적인 감정과 욕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도덕법의 질서를 정면으로 대항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본인은 우리 나라 현대 교회에서 벌어지는 성적인 문란함을 김남준 목사님께서 쓰신 책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에 있는 내용을 인용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에서 눈에 잘 띄던 자매였는데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희 목사님이 주례를 해주셨지요. 그 날이 토요일이라 주일을 지내고 신혼 여행을 갈 계획으로 바로 호텔에서 신혼 첫날밤을 지내게 되었답니다. 신랑이 새벽녘에 보니 신부가 없어졌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두리번 거리다가 창 밖을 내다보니 호텔 정원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는 신부가 보였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미행을 하였는데, 전화를 하더니 동네 반대쪽에 있는 여관으로 가더랍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여관 입구에서 마주쳤지요."

위의 사실은 김남준 목사님께서 어떤 부교역자를 통해 그 교회 목사님에 대해 들었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기가 막힌 내용입니다. 이것은 아모스서에서의 사건 이상으로 타락한 사건입니다. 교회를 바르게 섬겨야할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여야 할 사역자가 부패하였다면 그를 교회의 목회자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내용이 그 사건으로 인하여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적인 사건들이 심심찮게 소문으로 들려오는 현 세태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진리가 막히느냐, 아니면 진리가 어떻게 하면 드러나느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 목사님의 죄를 지적하면서 정죄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목사님의 죄악을 덮어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가 막히지 않고 세상에 드러날 것인지를 고민하여야 합니다.

이 사건을 말해보면, 목사님에 대하여 분명한 치리가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사법적인 책임에 따른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자신도 그러한 죄를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자신을 살피면서 성적인 타락에 있는 교회의 아픔을 끌어안을 뿐만 아니라 죄를 범한 목사님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만이 거룩하고, 자신만이 온전한 경건을 유지하고, 자신만이 성에서 자유로운 자처럼 행세하는 것은 교만한 죄악으로 빠지기 쉬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자세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주님께 자신을 돌아보며, 잘못이 있으면 회개하고 죄악으로 부패한 교회의 현실을 정당한 방식으로 처리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아모스가 전달할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어떤 사람들처럼 심판의 하나님을 선포만 하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북이스라엘에게 죄악을 지적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경고를 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는 것이며, 타락한 북이스라엘 속에서도 남은 자들이 여전히 주님의 은혜로 신앙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변함없이 이루어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8)

아모스서에서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만이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온전히 세우시는 긍휼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뜻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진리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막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종교적인 행위를 등한히 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활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십일조도 잘 하였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많이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이것이 아모스에게서 지적을 받는 북이스라엘의 종교적인 형편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굉장한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열정은 말씀을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귀한 선물을 우상이나 숭배하는 샤머니즘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우리는 성도들의 죄악이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가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사회는 하나님께서 가정을 통하여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내면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모스 시대의 글은 무시간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계시의 방식에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는 성도의 본질적인 구원의 서정과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계시의 내용이 자신들을 통하여 합당하게 드러나도록 세상과 전투하는 교회, 그리고 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승리하는 교회를 지향하면서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로 세워져 가야 합니다.{{}}   

권형록 목사 / 안산 푸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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