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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7

 

 

 

 

 

 

  

     

    본문 : 아모스 2장 6절 ∼ 2장 8절 말씀

 

하나님께서 아모스서를 통하여 지적하고 있는 북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죄악이 다섯가지로 요약할 수 있음을 지난 설교에 밝혔다. 다시 요약해 보자면,

(1)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 공평과 정의를 드러내는 자를 학대함.

(2)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 사회에서 도움이 필요한 약자들에 대한 북이스라엘의 포악성.

(3)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 선량한 자들의 양심을 짓밟고 억누르게 하는 권력의 횡포.

(4)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를 무색케 하는 성적인 타락.

(5) "모든 단 옆에서 전당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라." ― 실제적인 교회의 타락.

 

시대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렇듯 북이스라엘의 다섯 가지 죄악이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는데, 이들 죄악의 근본적인 형태는 어떤 특정한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 사회 속에서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자기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살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성도답지 못하게 만드는 이 시대 정신과 죄악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올곧게 지키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번 호에는 본문의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함'과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부분을 살펴보면서 이 시대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는 사회

본문 중 세 번째로 언급된 이스라엘의 죄악은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겸손한 자'는 'the poor', 'the meek', 'the needy' 등과 같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여러 가지 번역본을 보면, 먼저 B.D.B.에서는 'the poor, or the weak, oppressed by rich and powerful'로 표현하고 있으며, N.S.A.B.는 'the humble'로, N.I.V.는 'the oppressed'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굽게 한다'는 뜻은 'turn aside' 또는 'incline'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N.I.V.에서는 좀 더 의역을 하여, 'deny justice to the oppressed'로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번역본들을 살펴보자면 다양한 해석들 속에서 그 안에 어떤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겸손한 자'는 부유한 계층과 권력층으로부터 소외되는 자일뿐만 아니라, 공의나 정직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도록 억누름을 당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회는 의인들을 핍박하는 사회였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양심을 부정직과 불의로 억누르는 사회이다. 아모스 5장 12절에도 이러한 표현이 있다.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이스라엘 사회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이었지만 여전히 죄악된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이기 때문에 당연히 범죄가 있기 마련이고, 사회 속에는 인간들끼리의 갈등과 분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범죄와 분쟁을 조정하기 위하여 재판정이 있었다. 그 재판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따라 백성들의 분쟁을 해결하고, 범죄에 대하여 공의로 재판을 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재판하는 자의 태도는 분명히 어느 쪽에도 편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19:15)"

하나님의 율법으로 재판하는 자는 가난한 자가 고소를 하였다고 하여 가난한 자에게 동정을 하여 판결을 내리거나, 그 반대로 부유한 자나 권력이 있는 자를 두둔하여 형량을 선고할 수 없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

우리는 예전에 재판에 있어서 비리(非理)를 들었다. 예를 들면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장관급 이상의 관직을 지냈던 이에게 퇴관 후에도 재임 당시의 예우를 부여하는 일"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법을 다루는 사법기관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어 왔다. 판사로 오랫동안 재직하다가 그 지역에서 변호사를 개업하면, 그 변호사는 그 사건의 진위를 떠나서 후배 판사는 그 변호사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다.

또 조금 다른 경우이기는 하지만, 마치 영화 속의 이야기와 같은 어떤 소송 사건을 말해보겠다.

10억 원 상당의 토지에 대한 민사 소송이 제기 되었다. 사기꾼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다소 허점이 있는 주인을 상대로 10억 원 상당의 땅을 빼앗기 위하여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이 걸린 땅 주인은 그 소송에 대한 방어를 하기 위하여 변호사를 사서 변호사에게 착수금으로 4∼5백만 원을 주고 그 민사건을 처리하였다.

땅 주인은 당연히 자신이 이길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소송을 건 사기꾼이 변호사에게 재판에서 져주는 조건으로 1억 또는 2억을 주겠다고 제안을 하고,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자신이 받는 수임료(受任料)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고의로 재판에서 패소하였다. 당연히 땅 주인은 억울하게 땅을 잃게 되었다.

이런 내용은 어떤 영화에 나오는 내용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법정에서 벌어지곤 했다. 아무리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돈이 없는 서민들이 권력과 돈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바로 연약한 자의 양심을 굽게 만드는 사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면서, 그 율법에 근거하여 재판을 하도록 하셨고 그 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나타내시려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회는 뇌물과 같은 정당하지 못한 절차와 태도로 재판의 판결을 굽게 만들었고,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더욱 짓밟아서 그들로 하여금 도저히 양심대로 살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도저히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기가 두려운 사회의 모습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이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회이었다.

앞에서 법조계의 비리를 말하였지만, 우리가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교회 내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에 대하여 과연 정당한 절차로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결정들을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가 도전해 오는 많은 일들에 대하여 정직과 의로움과 사랑으로 판단을 내린다면, 그 영향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부패성에 대하여 올바르게 지적할 곳이 없어지고 사회로부터 교회가 지탄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각 시대마다 성도로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그 역할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만, 활동 범위는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까지를 염두에 두면서 세상을 향해 뻗어가야 한다. 이 말은 교회가 세속화되라는 말이 아니다.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소유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세상 안에서 역사 하셔서 객관적 사실로 남겨두시는 계시를 주목하여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북이스라엘처럼 겸손한 자를 굽게 하는 사회는 하나님의 법도와 멀어진 사회이며, 하나님의 진리가 불의로 인하여 막혀진 사회이다. 어느 시대이건 간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어진 양심의 자유를 억누르게 하는 사회에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만이 있을 뿐이다. 성도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도덕법에 근거한 진리의 싸움을 해 나감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 사회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성적으로 타락한 사회

우리가 네 번째로 살펴볼 내용은 성적인 타락에 대한 것이다. 아모스 2장 7절을 보면,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부자'는 누구를 가르키는가? 돈이 많은 부자인가? 한글 성경만 보면 오해하기 쉽다. '부자'는 아버지와 그의 자식이다. 그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갔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한 여인'은 매춘 행위를 하는 여자이고, '다녀서'라는 말은 성적인 관계를 염두에 둔 단어로 볼 때, 아버지와 자식이 매춘 행위를 하는, 동일한 여자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내용이다.

여러분께서 TV 드라마 '용의 눈물'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드라마에서 이방원은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공신들을 제거하고 심지어 자신의 사돈까지 죽이는 정치를 펼쳤다. 그 중에서 사병들이 많은 이거이와 그의 아들의 세력을 꺾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는데, 이거이와 그의 아들이 기생집에서 한 기생을 두고 놀아났다는 소문을 이용하여 그들의 세력을 꺾었던 것을 본다. 실제로는 소문이었을 뿐이었는데, 그 당시 이거이와 그의 아들이 한 기생과 함께 동침하였다는 소문은 가정의 법도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인륜을 저버린 패륜적 것으로서, 이방원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비교하면 이방인으로서, 양심이 그들의 율법이 되어 자신의 삶을 살았다. 비록 이스라엘처럼 직접적인 하나님의 율법을 제시받지 못하였어도 우리 선조들은 하나님의 도덕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가정에 대한 인륜적 질서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와 만나는 면이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율법을 직접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아버지와 자식이, 비록 매춘 행위를 하는 여자라 할지라도 동일한 여자와 동침하였다는 것은, 매춘 행위를 한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법도를 완전히 무시할 정도로 그들이 성적으로 문란하였음을 나타낸다.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 누구든지 그 자부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이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20:11∼12)"


권형록 목사 / 안산 푸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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