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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6

 

 

 

 

 

 

  

아모스 강해

      아모스 2장 6절 ∼ 2장 8절 말씀


계속되는 경제적 빈곤과 그에 따른 정신적 절망감으로 인하여 매일 35∼6명의 이웃이 자살을 한다. 그런데 이 통계는 가족이 동반 자살할 경우 자살을 유도한 자만이 그 수치에 포함이 되고 나머지는 자살이 아닌 타살로 기록되기 때문에 30여 명에 곱하기 3이나 4를 하면 매일 자살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는 사람들의 대략적인 수치가 나올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아모스를 감동으로 인도하셔서 북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바를 깊이 새겨나갈 때, 지금 우리 교회의 역할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죄악상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에 앞서 이방 민족과 유다를 향하여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서 반복되는 구절,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가 있다. 이 구절은 각 민족이 3가지와 4가지를 합하여 일곱 가지의 죄를 범하였음을 말함이 아니다.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라고 표현한 것은 일곱 가지를 말하기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일곱이란 숫자가 "완전함"이나 "무한"의 뜻으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많은 죄로 인하여"라는 말을 먼저 서술한 의도는 각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너무 많음을 먼저 말해준다. 그 다음 내용에서는 그 민족의 돌이킬 수 없는 대표적인 죄를 지적하였다. 아모스 2장 6절에도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는바, 6절 이하에 나오는 북이스라엘의 죄악상은 아모스 전체에서 다루는 북이스라엘의 죄악의 핵심을 언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아모스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의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지적하고 있는 핵심적인 죄악은 무엇인가? 대략 다섯 가지로 말할 수 있다. (1)"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 공평과 정의를 드러내는 자들을 학대함. (2)"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 사회에서 도움이 필요한 약자들에 대한 북이스라엘의 포악성. (3)"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 선량한 자들의 양심을 억누르게 하는 권력의 횡포. (4)"부자(父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를 무색케 하는 성적인 타락. (5)"모든 단 옆에서 전당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라" ; 실제적인 교회의 타락.

위의 다섯 가지가 북이스라엘의 죄악상을 포괄한다. 이번에 (1), (2)번의 내용을 살피고 나머지는 다음 설교에 다루도록 한다.

 

의인을 학대하는 사회

북이스라엘은 공평과 정의를 드러내는 의인을 오히려 학대하는 사회였다. 아모스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때 "의인"은 국가교회의 형태인 북이스라엘의 백성이고, 비록 북이스라엘이 종교적인 타락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대하는 백성이기에 "의인"이라 함은 북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하여 책망하는 자로 파악이 된다. 아모스 5장 10절에 표현되어 있는 자가 "의인"이라 할 수 있다.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여 그 시대의 죄악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자들을 무시하고 싫어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부패성에 근거한 정치, 사회, 문화를 누리며 사는 생활방식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고리타분한 듯한 하나님의 율법은 자신의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 무시하며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다. 그러기에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자신의 죄악성을 들추어내는 의인들을 미워하고 시기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의인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의인들을 은을 받고 팔아버리는 북이스라엘의 영적인 무지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의인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풍토인가, 아니면 의인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오직 자신의 입지만을 유지하려는 입장인가?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면, 근대사로 들어오면서, 더 구체적으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입장을 유지하려는 교회들은 그 계몽주의 시대의 평가와 핍박을 받으면서 몰락하였고,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한 개인의 주관적인 신앙 체험을 중시하여 성경을 죽은 문자화시킨 교회들은 성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들은 '오직 성경'이라고 외치지만, 성경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에 의존하면서 재세례파가 범하였던 급진적인 종교적 오류를 얼마나 많이 반복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여 진리를 드러내는 자와 그 진리를 깨달은 바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인들이 살기에는 얼마나 어려운 현실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도를 사랑하는 자로서 조금 더 현실을 생각해보자.

아모스가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으로 무지함을 지적하였으나, 그들이 종교적으로 얼마나 나태하고 종교적인 의식을 무시하였는지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한다.

아모스 4장 4, 5절에 보면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廣布)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북이스라엘은 비록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열되기 전의 종교적인 유산과 여로보암 1세 때부터 내려오는 종교적인 방식과 주변의 이방 종교를 혼합하여 자신의 욕구대로 신앙을 토착화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적으로 나태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조들로부터 전해 받았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인 형태를 더 열심히 유지하려고 하였다. 종교적으로 열심(熱心)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의 모양은 있지만 그 내용은 혼합 종교일 뿐만 아니라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종교 의식이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인 만족을 '즐겼던'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이 2750여 년 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넘길 수 있을까? 컴퓨터도 없고 TV도 없고 자동차도 없는 아모스 시대가 우리 시대와 다르다고 옛날 이야기로 넘길 수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와 너무 비슷하여 놀랄 뿐이다.

교회는 의인을 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의 순수한 생각과 마음이 드러날 수 있도록 교회는 살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우리 시대를 밝히고자 하는 사회 속의 의인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비록 신앙이 다르고 생각이 다를지라도 사회의 죄악을 지적하고 사회를 빛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정직한 자가 있다면 여러 모로 지지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의 정직과 공평함이 자연스럽다면 그 사회 속에 있는 교회가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의 깊은 도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사회

둘째로 살펴볼 것은 가난한 자들이다. 가난한 자들은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며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궁핍한 자를 신 한 켤레를 받고 팔아 넘기는 포악성을 보였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가난한 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재산을 서로 나누어서 생존할 수 있도록 돌보아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신 한 켤레의 하찮은 가치로 동족을 넘겨버리는 북이스라엘의 비정함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극단적인 죄악상의 두 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받은 율법을 보면,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군이나 우거하는 자같이 너와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레 25:39, 4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동족이 어려움에 처하였을 경우 종으로서가 아닌 품꾼이나 우거하는 자로서 인격적인 대우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깊이 배어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권력자와 가진 자의 횡포가 철저하게 나타난 사회였으며, 약자인 가난한 자는 인간으로서 대접받지도 못하고 물건으로 취급되어 팔리는 사회였다. 더 나아가 아모스는 궁핍한 자를 팔아 넘기는 것에 덧붙여,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라는 구절을 첨가하고 있다. 이것은 권력자나 가진 자들이 생존하기 어려운 가난한 자의 소유마저도 가지려는 탐욕스러움을 말해주는 내용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서민들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 정작 정치를 잘못하고 나라의 경제를 피폐하게 한 장본인들이 계속적으로 권력의 하수인으로 있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겠는가? 서민들이 땀흘려 벌어들인 임금을 삭감할 뿐만 아니라 세금도 올려서 서민들을 더욱 빈곤한 계층으로 전락시키는 정책이 우리가 접하는 현실이 아닌가!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신앙과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난 파행적인 삶이 백성들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였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율법과 그 율법의 정신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탐심으로 이웃을 권력과 경제로 평가하여 오히려 도움이 필요한 궁핍한 자를 지배하려는 포악성으로, 또 혼합적인 종교 성향으로 하나님의 이름과 거룩함을 이방 민족의 저급한 신으로 전락시키는 죄악을 범하였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그 말씀은 죄악으로 가득 찬 그들에게 짐이 되었고 벗어버리고 싶은 옷과도 같았다. 오직 자신들의 삶의 편의를 도와주는 종교만을 기대하였다.

 

우리는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는 내용을 새겨들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시대를 넘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북이스라엘의 배도적인 삶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것을 명하신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교회 내의 서민들에 대하여 어떠한 배려를 하고 있는가? 두 교회를 비교하면서 설교를 마치겠다. 서울의 큰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께서 너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유서를 남기고 자녀와 함께 동반 자살을 하였다. "집사님이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차치하고, 큰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도와주었다면 비극적인 일은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 앞에서 그 교회가 져야 할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이와는 반대로 안산에 있는 어떤 교회는 전교인에게 돼지 저금통을 나눠주어서 그 저금통이 차면 교회 사무실에 가져오라고 하여 교회내의 실직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어려운 시대에 서로가 고통을 같이 나누는 모습이 참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직장도 잃고 가정도 파괴되고 심지어 고귀한 생명마저도 끊어버리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고 강퍅해 있으며, 이기적인 죄악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때, 시대의 죄악의 부패한 성향이 만연할수록, 참다운 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신 빛은 더욱 드러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교회와 성도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자.

권형록 목사 / 안산 푸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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