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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32

 

 

 

 

 

 

■서로돌아보아

"휠체어가 내게 주신 은사입니다"


럭비선수에서 목사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열심 : 박창권 목사님



"국가 유공자이시기 때문에 연금이 나오긴 하죠. 그래도 별다른 보수도 없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사시는 것을 보면, 정말 다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정말 좋은 분이셔요."

광주보훈병원 7병동에 근무하시는 박명옥 수간호사님은 그녀가 아는 박창권 목사님을 이렇게 자랑한다. 이제 벌써 12년째 원목 생활을 하고 계시는 박창권 목사님은 누구에게나 '좋은 목사님'으로 통한다.

 

이름만의 신자(信者)에서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쯤 되셨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필자는 목사님과의 대면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계시긴 했지만 흰머리라고는 새치 하나도 찾아보기 힘든 아주 건강한 젊은 분이셨다. 그러나 보훈병원에서 목회를 하신 지가 벌써 열 두 해나 되셨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아니었듯 박 목사님도 처음부터 신실한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교회라고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는 졸업 후 군인이 되려는 생각으로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사관학교에서는 종교를 갖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습니다. 불교, 천주교, 개신교 세 종교 중 하나를 선택해서 종교 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었죠."

다행히 그는 가까이 지내 오던 선배와, 같은 방을 쓰던 크리스천 친구들의 권유로 자연스럽게 교회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큰 뜻이 있었음을 초신자인 그가 알리 만무했다.

"당시에는 육해공 3군 사관 학생들이 참가하는 체육대회가 10월 1일 국군의 날 해마다 있었습니다. 체육부, 럭비부 등이 있었는데 저는 럭비부에 들어갔죠."

럭비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가 럭비부에 들어가고 선수로 뛰게 되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체격 조건 때문이었다. 훤칠한 키에 우람한 체격이 럭비 선수로서 적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배들에 의해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여 선수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준비 과정이었음을 아무도 몰랐다.

처음에 그는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예배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음에도 운동선수라는 이유로 약간의 아량이 베풀어졌던 탓에, 그는 자주 예배를 빼 먹곤 했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일꾼 삼으시기 위한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시기에 이른다.

4학년 여름 8월 21일. 10월에 있을 체육대회를 위한 선수들의 합숙 훈련이 시작되었다. 럭비부 역시 합숙훈련에 들어갔고 실제 경기를 위해 고려대학교 럭비팀과 연습 경기를 갖게 되었다. 겨우 아마추어 선수 정도의 수준이던 사관학교 선수들이 전문 럭비 선수들인 고대팀과 게임이 되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경기에서 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지금의 '박창권 목사'는 존재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그는 경기 도중 어처구니없게도 목뼈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전신 마비라는 치명적인 선고를 받은 그는 어쩔 수 없이 병실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나님께 나아오기까지

그는 전신이 마비된 상태로 서울통합병원에서 2년 1개월 정도 입원해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 졸업이 가능하게 되어 형식상 제대를 하고 서울보훈병원으로 옮겨 다시 2년 정도의 병원 생활을 하게 된다. 그것이 영원한 병원 생활로 이어질 줄은 전혀 모른 채.

입원해 있는 동안 그는 조금씩 신앙을 회복해 나가기 시작한다. 아니 엄밀한 의미에서, '회복'이라기 보다는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 했던 것 같습니다. 목사가 되었지만 지금 그렇게 하라면 아마 못 할 거예요."

당시 병실에서 열정적으로 예배를 인도하는 그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박 목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에게 신학에 대한 열정이 생긴 것도 이 즈음이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고 1987년 4월 9일, 실제로 목사 안수를 받기에 이른다.


돌아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처음엔 저에게 장애가 있으니 장애인 목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병원에서 살면서 보고들은 것은 병원 생활뿐이었습니다. 일반 교회에서 신앙생활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신기하게도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에 맞춰 광주에 보훈병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정확하게 4월 20일 보훈병원이 광주에서 문을 열었다. 서울보훈병원 목사님의 소개로 박 목사님은 고향 순천과 가까운 이 곳 광주보훈병원에 새 살림을 차리게 된 것이다. 주일 오후 2시와 수요일 저녁 7시면 이 곳 보훈병원에서도 어김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때론 환자들을 울리기도 하고 때론 그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는 위로와 치료의 말씀이 어김없이 계속된다. 예배가 없을 때는 300병상 정도 되는 병실을 일일이 휠체어를 밀며 돌아다니시는 박 목사님은 목회자라기 보다는 이 병동의 주인이요 친구이다. 성도라고 해 봐야 완쾌되면 그만인 그들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박 목사님은 성도 수에 대한 욕심도 없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용기를 주는 것으로,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신다.

"하나님께서 원목으로 나를 지목하신 것 같아요. 일반 교회에서는 한 번도 생활해 보지 않았지요, 교회 성장에 대한 욕심도 없지요. 또 이렇게 장애를 주신 덕분에 환자들에게 더 친근감 있게 다가가도록 하셨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잘 맞아 떨어져요."

하나님께서 감당하라고 하신 만큼만 감당할 뿐 욕심을 내지 않으니 어려움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박 목사님은 '사모마저 꼭 맞는 사람을 주셨다'고 즐거워하신다.

병 문안 왔던 조카의 친구였던 사모님은 간호사 출신으로, 지금은 목사님의 '개인 간호사' 격으로 오로지 목사님을 보살피는 데만 온갖 힘을 다 쏟고 있다. 아직도 어린 소녀 마냥 부끄러움이 많은 사모님을 두고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신 사모'라고 하신다. 성격이나 모든 것을 미루어 일반 목회를 했으면 아마 사모 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놀리면서.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겁니다."

이제까지처럼 앞으로도, 박 목사님은 병원 생활을 하던 중에 들었던 한 전도사님의 설교를 잊지 못한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비유를 들어 설교를 하시던 그 전도사님은 앞을 못 보는 분이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하신다"는 설교를 듣고 목사님은 목회의 길을 결정하게 되셨다고 한다.

"인간적인 생각만으로는 목회를 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였습니다. 참 신비합니다."

겨우 손목까지만 쓰실 수 있게 된 목사님은 자신의 휠체어 생활에 불평은커녕 감사가 넘친다.

"제가 다치지 않았으면 아주 교만한 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다리 하나로는 말을 안 들을 것 같으니까 하나님께서 사지를 다 부러뜨리셨겠지요. 저는 남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치유의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내 몸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휠체어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입니다."

자신의 신체적 어려움에 대해 불평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박창권 목사님. 그는 목회에 대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늘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요 계획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시도록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계획이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도해 오신 것처럼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도하실 테니까요."

김후지 기자(huj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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