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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29

 

 

 



 

 

■팡세

 

멋진 세상을 찾는 사람들

서평 -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소마 2그램쯤 복용한 기분으로, 자판을 두들긴다.

100년쯤 전 태어난 사람이 무려 2500년 후의 세상을 소설로 썼고, 그것은 당장 지금으로부터 50년쯤 후면 다가올 세상을 묘사한 꼴이 됐다. 시간을 X축으로 하는 사회 발전의 비례 곡선은, 헉슬리가 생각한 그것보다 훨씬 더 가파른 형상인가 보다.

이렇듯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갈 데까지 간 성장·발전의 수레바퀴는 이젠 세상을 더 어떻게 변화시킬지 두렵게 만든다. 인간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인류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인가 싶을 때도 있다.

문명은 자연 정복의 과정이란다. 그래, 더 이상 정복할 것이 없이 다 정복해 버리고 나면 그땐 어찌할 터인가. 잘난 인간의 허세를 증명해 주려는 문명 과정의 누적 현상은 이제 더 이상 담아놓을 그릇이 없을 만큼 팽창해 있다. 자, 계속 퍼담아 보라! 여태까지 문명을 담았던 그릇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 증세의 심각성이 자연 상태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진단이 생태계의 파괴로 도덕과 윤리의 소멸로 눈앞에 하나 둘 증명되면서, 인류에게는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종말을 준비하는 종교적인 장을 마련해야 할 것인지, 그것이 싫으면 헉슬리처럼 종말을 피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강구하든지.

그냥 앉아서 종말을 준비하겠다면, 좋다. 뭐라 더 할 말은 없다. 아니, 그렇다고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뭔가 대안을 찾아보겠다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좀 있는 것이다. 대안을 찾아서, 멋진 신세계를 찾아서 헤매는 사람들이여, 기왕 찾으려면 잘 생각해서 멋진 신세계를 한번 찾아내 보시라. 그래서 머리 싸매고 찾기 시작하여 결국 언젠가 찾아 낸 대안이 있다면 그 끝이 헉슬리가 제시한 세상과 어떻게 다른지 점검해 보라.

 

혹자는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 노스텔지어를 잃어버린 시대라 이름짓기도 한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선인지 모두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정녕 망할 시대…. 아니,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시대라면 고치고 정돈하면 될 터이다. 아예 꿈을 잃어버린 시대, 지향점도 없이 꿈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인 것이다.

꿈이 없는 인간은 곧 죽음을 통해서만 그 최후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자살, 그 어이없는 생의 마지막 단어가 지금은 떳떳하게 대안(代案)의 자리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뒤르깽의 주장처럼 자살이 사회적 결과라면, '멋진 신세계'의 유일한 종말의 길은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적인 자살, 아니 사회 그 자체의 자살에 의한 것이 되리라. 인간이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아도 자살은 성립하니까. …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자살을 어떻게 보고 있던가? 한숨―.

회색 빛 시멘트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빛깔의 다양함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 획일적인 시멘트 색깔이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의 눈에 나뭇잎은 녹색, 하늘은 파란색일 뿐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물과 하늘의 교차에 의한 빛깔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심미론(審美論)을, 나아가 인류의 노스텔지어를 논하기란 불가능하다. 논할 가치가 없다.

인간이 감수성을 상실하는 날, 그 날이 바로 인류의 제삿날이다. 참으로 그러하지 않은가.

 

과학의 발전의 역사를 보면 기술의 진보 수준은 항상 인간의 필요 내지는 문화의 수준에 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특이한 몇몇 장족(長足)의 진보를 제외하고 말이다. 새로운 진보는 어떻게 보면 그 시대 사회의 문화가 그것을 얼마나 빠르게 수용하느냐에 달린 것이리라.

'멋진 신세계'는 진보가 인간의 의미를 넘어섰다. '멋진 신세계'의 총통은 독자에게 비극이라고는 없는 퍼펙트 사회를 제시한다. 사회가 불안정해야만 비로소 비극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의 세계는 안정되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들은 모두가 행복하며, 그들은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가 있다. 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며, 얻을 수 없는 것들은 아예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극을 모른다. 여기가 그들이 찾아낸 '멋진 신세계'이다. ― 그렇다면 그들이 진정한 행복을 알 수 있을까? 상대적인 개념의 행복을 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진리를 찾지 못해 절망했던 버나드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이대로의 나 자신이 좋소. 비록 비참할지언정 이대로의 내가 좋단 말이오. 소마를 먹고서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나는 내 자신이 되고 싶소. 다른 방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자유를 원하지 않소? 타인의 방법이 아닌 것으로 말이오."

버나드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들의 행복은 '행복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어쩔 수 없는 행복'에 지나지 않았다. 헉슬리가 보여주었듯이, 과학의 진보는 결국 만족이 없고, 환멸에 이를 뿐이다. 멋진 신세계는 과학의 몫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예술은? 예술은 그러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을 충만 시킬 수 없다. 예술은 '저편의 것'을 '이편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 밖의 선(善)하다 하는 것들, 예를 들어 인도주의 같은 것 역시 절대적 선이 될 수 없다. 가난하고 병든 자, 과부와 고아들, 정신질환 자들과 죄인들에 대한 관심이 고양되는 한편에서는 배금주의, 매춘, 알콜 중독 등의 불의도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도무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마저도 인간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위가 아니다. 인간은 그가 가진 이기적인 본성과 계속 싸워 나가는 것이며, 사실 그러한 투쟁에의 의지 역시 충분히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더 무얼 기대했는가.

 

해답이 없는가 보자. 인간은 소위 '이상적인 가치'들이 아닌, 절대 진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인간은 절대 진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니, 찾고는 있으나 바른 방법과 길에서 찾고 있지 않으며, 참된 장소에서 찾지 못하고 있다. 파스칼도 말했다. 인간이 위대하면서 동시에 안타까운 것은 바로 그런 점 때문이라고.

진리 찾기에 지친 인류는 이제 더 이상 절대 진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진리 없이도 살아보려고 스스로의 두뇌를 조작해 버렸다. 스스로를 속이고 자위하는 그들, 그러나 거짓은 본질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인간은 정녕 그 해결책을 절대 진리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이제, 절대 진리가 무언가?

인간은 진, 선, 미, 선과 같은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땅에서는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는 피조물임을 말해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초자연'에 대한 사색을 하게 되고,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감각적인 욕구를 뛰어넘어 이성과 양심에 의해 그 어떤 높고 선한 무엇인가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그것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선이 아닌, 그 자체로 영원불멸한 영적인 선이다. 고귀하고 절대적인 신적 선 안에서 안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삶의 질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거기 있어야 한다. 우리의 노스텔지어는 이 땅이 아니다. 인류여, 겸손하라. 그들의, 우리들의 부질없는 신세계로의 노력이 안타깝다. 그들이 꾸민 멋진 신세계는 미안하지만 실패다. 우리가 과학으로, 정보화 사회로, 그 무엇으로든 꾸미고자 하는 유토피아의 세계, 꿈의 세계는 미안하지만 불가능하다. 어디 한번 만들어 보라. 단언하건대, 인간의 힘으로 이 땅에서 그 어떤 초월의 세계를 만들 수 없다.

 

헉슬리는 실패한 신세계를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서평을 쓰는 작업은 그래서 늘 즐겁다. 책을 읽고 내 나름대로 느낄 수 있고 평할 수 있는, 다른 이의 평을 읽으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그를 또다시 평할 수 있는 세상….

이 얼마나 멋진 구세계인가!

글 /황희상(pulitzer95@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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