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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28

 

 

 



 

 

■연속기획

전도는 '설득'이 아닌 '선포'

하나님 나라의 확장, '우리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 하는 모습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우리에게 복음 전파의 동기를 부여해 준다.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복음의 메시지를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일은 분명 귀하고 값진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생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분명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일텐데, 그러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려면 당장 신학을 공부하고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선교단체 사람들은 노방전도도 열심이고 자기 돈 들여가며 해외로 단기선교도 나간다. 그들은 아무리 봐도 예수님의 진짜배기 제자들인 것 같다. 자, 나는 뭔가? 단기선교는커녕, 바로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이거, 내가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스럽다. 위와 같은 성경 말씀을 대할 때마다 나는 뭔가 아주 잘못 살고 있는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그렇다고 어디다가 물어보기도 그렇다. 창피하다. 전도하자는 데 무슨 말이 많냐는 책망을 들을 것만 같다. 다 내가 못나서, 내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지 하고 자책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나 싶기도 하다.

지금부터 이 같은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풀어보도록 하자.

 

택한 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전도란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의 내용은 고린도전서 15장 3∼4절을 통해 그 핵심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이 곧 복음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구원'이다. 구원의 문제는 대단히 신비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기본적인 내용은 이렇듯 간단하게 정리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점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가.

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창세 전에 택함 받은 자들'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전부가 아닌 일부, 즉 구원의 은혜는 택함 받은 자들에게 있는 것이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예정론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이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상'과 '선물'은 다르다. 선물의 의미는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모든 것에 대해서 영원 전부터 변치 않는 완벽한 계획을 가지셨고, 따라서 그의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와 운명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인류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말한다. 구원받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도 없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행위 그 자체마저도 구원받는 조건이 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른 특징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어떤 행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어떻게 하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바탕인 신본주의(神本主義)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신론'에서 하나님의 작정을 '앞으로 일어나게 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모든 것에 대해서 영원 전부터 변치 않는 완벽한 계획을 가지셨고, 따라서 그의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와 운명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인류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가 영원 전부터 우리를 주권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믿게 되고 구원받는 것이지, 우리가 '믿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회개하도록 선택하신' 것이며, 이 선택은 변하지 않는다.

선택과 유기에 대한 개념을 꺼내어 놓고 전도하다 보면 오히려 전도의 길이 막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전도자들은 그 동안 여러 가지 '편법'을 써왔다. 예정 교리가 인간의 머리로 잘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선행(善行) 때문도 아니요, 심지어 믿음과 회개 때문도 아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과, 그 어떤 행위도 구원의 원인이 결코 될 수 없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조차도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분명히 하자.(엡 2:8, 롬 11:6)

 

그러나 하나님은 버리기도 하신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은 구원받도록 선택하신 어떤 사람들과 달리 나머지 사람들은 은혜를 주시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셨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미리 작정하셨다.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라(살후 2:10 하)' 이 말씀은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진리,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전도를 할 때,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라고 말했다. 이때 문제가 발생한다. 그 사람이 만일 택함받은 자가 아니라면, 그가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고 영접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된다. 전도자는 여기서 뜻하지 않은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일 수도, 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이 복음을 받아들이신다면 그것이 곧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라고 전도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전도하다 보면 왠지 맥이 빠진다. 스스로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설득력이 없다는 말이다. 전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 만일 인간의 구원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자기가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 아무렇게나 살면 어떤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내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전도를 하느냐고 오히려 묻게 된다. 여기서 전도자의 고민이 생긴다.

 

테크닉에 의해 가려진 진리

전도하는 모습사실 예정 교리는 필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예정 교리가 죄인 된 인간의 최후 권리를 단호히 부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고, 그것은 곧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 했던 타락한 인간이기에,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대해 당연히 반항을 하게 된다.

이처럼, 선택과 유기에 대한 개념을 꺼내어 놓고 전도하다 보면 오히려 전도의 길이 막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상당수의 전도자들은 그 동안 여러 가지 '편법'을 써왔다. 우선 일부 목회자들은 예정 교리 설교하기를 피해버린다. 예정 교리가 인간의 머리로 잘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고 주로 거부감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이해시키고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까놓고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이유도 댈 수 있겠지만.

또는 아예 교리 자체를 바꿔버리기도 했다. 개혁신앙의 교리를 요약한 '12신조'를 제정할 때는 선교지의 문화적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상황 속에서 예정론에 대한 교리를 빼기도 했다. 미국 북장로교가 선교를 위해 감리교와의 연합을 모색할 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개정하여 잘못된 교리를 추가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의 교회사를 통해서도 이러한 모습들은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편법은 궁극적으로 죄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악한 것이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무시하여 그분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을 제람바즈 교수(프란시스 쉐퍼 연구소장, 영국 라브리 총무)는 그의 책 '현대문화 속의 전도'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전도를 할 때, 전도 받는 대상자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 그 말씀'에 집착하여 사람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전도자는 오히려 그 걸림돌을 피해가려 한다. 더 쉽고 평이한 방법을 애써 찾아 헤맨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할 때 '회개하라'고 먼저 외치지 않고, 축복하는 말로 부드럽게 시작한다. 융통성 있고 세련된 전도자들이 일종의 편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전도의 테크닉은 테크닉으로 끝나야 한다.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테크닉이었다고 해서 그것을 절대 진리와 대등한 자리에 놓았을 때, 진리는 가려지고 종국에는 변질되고 만다.

그러나 편법은 대부분의 경우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 선교단체의 전도 프로그램은 검증될 필요가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사용되는 소책자인 "사영리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경우에는 거짓말이 될 수 있다. 선택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사실인 것처럼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지만, 유기된 자를 향해서는 '심판'의 목소리로 다가오신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다가오시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네가 어디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있는 것을 몰라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 아니다. 불순종한 아담의 폐부를 찌르는 심판적 성격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사영리'는 또 예수님을 믿으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영접하기만 하면 삶의 모든 영역이 정돈되고 만사 형통하리라는 것이다. 세속적인 가치를, 그것이 마치 구원 이후에 찾아올 축복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하여 소개한다. 그러면서 지금 당신의 삶이 이렇게 엉망진창인 것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또 부차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참고로, 이 선교단체에서 사용하는 또 다른 소책자인 "성령 충만한 생활의 비결을 발견하셨습니까?"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끊임없이 '영혼의 호흡'을 통해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의 삶이 정돈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치는 것을, 그 사람이 성령 충만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삶의 주체가 '나'에게 있다.

이것이 사람을 늘 불안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고, 나를 끝까지 책임지시리라는 확신이 없다. 나에게 일어나는 어려움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사탄의 공격에 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필요한 자책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잘못된 문화 풍토들은 상당 부분 이러한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

전도를 쉽게 해 보려고 생각해 낸 여러 가지 방법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일까. 전도의 테크닉은 테크닉으로 끝나야 한다.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테크닉이었다고 해서 그것을 절대 진리와 대등한 자리에 놓았을 때, 진리는 가려지고 종국에는 변질되고 만다.

 

무지에 의해 변질된 진리

어떤 사람들은 또 예정 교리를 인간의 논리에 맞게 수정하고 있다. 그렇게 수정된 교리는 가르치기 편하고 이해되기 쉽다는 이유로 수많은 교회에서 채택된다. 이것이 온 세상, 온 교회에 급속도로 퍼져나가서 이젠 걷잡을 수가 없을 정도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진리에서 벗어난 가르침 속에서 자라왔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임하며,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다. 내가 나의 의지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진리와 다르다.

이에 대한 두드러진 실례로 북미 연합 장로 교회에서 일어난 신조 수정 사건을 들 수 있다. 양자간의 차이를 잘 비교해 보면 진리가 교묘히 변질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정된 교리에 따르면,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그 사실을 인간이 인정하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도 무용지물이 된다. 성부 하나님은 A라는 사람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성자 하나님을 보내셨는데, A가 영접하지 않으면 성자 하나님은 괜히 의미 없는 죽음을 당하신 것이 된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신데, 어쩌면 손발이 그렇게 안 맞으실 수가 있을까.

수정된 교리대로 해석한다면 구원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달렸다는 것이 된다. 인간의 반응에 결과가 달려 있으므로. 이것이 최근 퍼지고 있는 신인협력(神人協力) 사상이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 홀로 완벽하게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작정을 인간의 힘으로 거부할 수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결정권자의 위치에 설 수도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렇게, 진리는 변질되었다.

 

북미 연합 장로교에서 일어난 신조 수정 사례

1858년부터 1925년까지의 교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자신의 은혜로우시고 자원하시는 행위로 말미암아,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 안에서 택함을 입은 일정 수의 사람들을 대신함으로써, 그들의 참되고 합당한 법적 보증인이 되셨으며, 그러한 보증인으로서, 그들을 대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율법이 그들에 대하여 요구한 모든 것들을 충족시키셨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위해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선언하는 바이다.

1925년에 교묘하게 변질된 교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자신의 은혜로우시고 자원하시는 행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다는 것과, 죄인을 위한 대속으로서 그의 죽음은 무한한 가치가 있는 화목 제물이었고,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만족시킬만한 것이었으며, 용서와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과, 이 속죄는 세상의 죄를 위해 된 것이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만 효과가 있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바람직한 전도 방법은

목회자들이 예정 교리를 올바로 선포하지 않고 자꾸 인간적인 테크닉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잘해 보겠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진리를 자꾸 변질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너무나도 완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도무지 신뢰하지 못하고, 성경보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더 고집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신비로운 영역에 감히 인간의 사고 방식을 개입시킨 것이다.

성경은 다만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를 주시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분에 넘치는 선물을 주신다'고만 말하고 있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며, 여기에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무어라 항변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겸손하게 있는 그대로를 전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을 마치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교만'이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작정을 인간의 힘으로 거부할 수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결정권자의 위치에 설 수도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렇게, 진리는 변질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세계를 품는다', 혹은 '주여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자', 심지어 '만방에 복음을 전파하여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자!'라는 식의 구호들을 들어왔다. 이런 이야기들은 마치 인간 구원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교회의 선교부나 전도대, 선교단체 등의 '구호'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진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노방전도, 혹은 일대일 전도 방식을 다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위치와 한계를 정확히 알고 겸손하게 살아가자는 것이다. 복음 전하는 자가 그 마음 속에 '내가 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해서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도록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뜻은 좋고 포부도 좋으나 되지도 않을뿐더러 주제파악을 정말 잘못한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겠다는 엄청난 교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전도는 '누구를 설득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복음을 그 어떤 것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그것이 '신비'이기 때문이다. 변증 설교는 필요하다. 그러나 전도는 단지 우리가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전해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지 선포할 뿐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일을 선포하는 것,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기뻐 즐거이 전하는 것, 이것이 바람직한 전도의 방법이다.

전도는 '설득'이 아닌 '선포'이다. 그 후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영역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믿지 않는 저들을 어서 빨리 구원시켜야 하는데…' 라는 필요없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선포할 뿐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일을 선포하는 것,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기뻐 즐거이 전하는 것, 이것이 바람직한 전도의 방법이다. 전도는 '설득'이 아닌 '선포'이다. 그 후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영역이다.

열심히 전도하자. 그러나 '내가 저들을 구원시키겠나이다, 주여 도와주소서!'라는 식의 열심보다는, 오직 은혜로 주어진 구원에 대한 감격과 기쁨을 증거하는 그러한 열심으로 열심히 전도하자.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우리의 최선이다.

voice21 편집장 황희상 (pulitzer95@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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