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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28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강해설교 연재 ②: 마태복음 5장 3~12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팔복은 모두 어느 정도 논리적인 연결을 가지고 언급되고 있지만, 긍휼히 여기는 자는 특별히 바로 앞에 언급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열망하는 자는 하나님과 맺는 바른 관계 때문에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갖게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의의 완성자이시요 의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자요,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지기를 열망하는 자이다. 따라서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가 나타내시는 모습을 닮는 자가 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의 복은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본받아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나타내야 할 태도의 구체적인 한 가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7절 말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긍휼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인 특성이요,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 긍휼이 무엇인가? 긍휼은 성경에서 자비라는 단어와 아무런 의미상의 차이 없이 번갈아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다.

긍휼이나 자비가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긍훌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것이나 동정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신구약 성경에서 긍휼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향해, 또는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들을 향해 나타내 보이신 태도에 대해 언급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긍휼과 은혜, 은혜와 자비 이 두 단어가 밀접하게 사용되고 있다. 에베소서 2장 4-5절 말씀을 보면, 긍휼과 은혜가 함께 사용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긍휼이나 은혜나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렵지만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놀라운 구원을 덧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이다. 반면에 긍휼은 죄인들이 그들의 죄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게 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배역하여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촉범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신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긍휼이다.

이 긍휼을 덧입어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마땅히 긍휼을 베풀어야 함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제 3자적인 입장에서 비참한 처지에 있는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 불의하게 해를 끼치는 자들에게 보복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셨던 것처럼, 그런 악한 자들과 그들이 행하는 악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며 용서의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계신다.

창세기 37장에서 50장에 걸쳐 등장하는 요셉을 보자.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요셉을 시기, 질투하고 불평했다. 요셉을 붙잡아 구덩이에 던져 넣어 괴롭혔으며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렸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종살이하며 당하는 길고 긴 수욕의 세월을 당해야만 했다.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속에 눈물의 빵을 먹으면서 13년을 견뎌낸 것이다.

긴 세월 뒤에 요셉은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천하를 호령할 때, 초라한 모습을 한 형들이 그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먹을 식량이 없어 굶주림 가운데 지내다가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오게 되었다. 요셉은 얼마든지 형들을 벌주고 해할 수 있는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형들에게서 받았던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들을 벌주거나 해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형들 앞에서 조용히 물러 나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는 형들에게로 돌아가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그들을 도리어 위로한다.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이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요셉 앞에 엎드려 그의 용서를 구할 때도 요셉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하며 위로함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자기가 악을 당하고 해를 입었지만 보복할 힘이 없어서 겉으로 입술로는 용서를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선언하신 데는 몇 가지 사항들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우리에게 불의하게 악을 행하고 우리를 해롭게 하는 자라는 것이 그 첫 번째 전제이다. 또한 이런 자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복수할 수 있는 힘과 기회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전제들 가운데 우리가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불의와 해를 끼치는 그 사람과 그의 행악들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의탁하는 것이 진정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의 태도이다.

로마서 12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같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이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죄와 사단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악을 범하면서도 그것을 악으로 알지 못하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하면 얻는 결과는 무엇인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면 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고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신다. "복이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얼마나 구별된 자들인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라기보다는 거대한 조직사회의 한 부분이요 기능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이 사회는 이미 힘과 권력이 우상화되어 버린 사회이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자기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여지없이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생존경쟁이 극심한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이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긍휼을 베풀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현대사회에서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세상의 사상이나 가르침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고 너무나 대조적인 사상이요 가르침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정의와 용기와 절제와 지혜의 네 가지 덕목을 칭송했다. 그런 사회에서 그 때의 철학자들은 긍휼을 "영혼의 질병(a disease of the soul)"이라고 불렀으며 긍휼은 성공자가 되기 위해서는 혐오하고 수치스러워 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겼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뿐 아니라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나라들은 명예와 수치(honor and shame culture)를 의식의 근간으로 삼고 있던 사회였다. 명예를 얻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응전하는 사회였다. 불의하게 악을 행하고 해를 끼치는 자는 나의 명예를 짓밟고 나에게 도전해 오는 자로 간주해 반드시 그에 대항하는 힘으로 응전하여 보복하는 것이 나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요 가문과 집단의 명예를 지키는 일로 여겨졌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나의 수치요 가문의 수치요 나아가서 내가 속한 전(全) 집단의 수치가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성공자가 되려면, 자기의 명예를 보존하려면 긍휼은 혐오하고 수치스러워 해야 할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사회를 향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고 계시니 이 말씀은 과히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에서 긍휼을 가르치셨으며 긍휼을 베푸셨으며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긍휼을 베푸시는 삶의 연속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출생하실 때부터 죄인들의 반대와 거역과 박해를 받으셨으며, 갈보리 십자가에 한 걸음씩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큰 반대와 거역과 박해와 증오를 받으셨다.

그러나 그럴수록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유(赦宥)하시는 예수님의 긍휼은 더 커져만 갔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견딜 수 없는 조롱과 멸시와 모욕의 말을 하며 고통을 가하며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긍휼을 베푸시며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십자가에서 보이신 긍휼만이 진정으로 죄와 악을 정복하고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희생에 근거하여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긍휼은 친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죄악을 담당하시며 그들이 당할 형벌과 진노를 받게 하심으로 베푸시는 긍휼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베풀어지게 한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우리를 통하여 긍휼이 베풀어지게 하는 능력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자들이 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아 안 자 외에, 십자가의 긍휼을 받아 누린 자 외에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자는 없다. 긍휼을 베푸는 자가 참으로 복된 것은 긍휼을 베푸는 자는 십자가의 긍휼을 이미 받아 누리는 자요, 이미 맛보아 안 자요, 하나님의 긍휼을 더욱 풍성히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란 말씀의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자가 되고 그 긍휼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가 될 때, 더욱 하나님의 긍휼을 사모하게 되며 더 많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다시 다른 사람들과 긍휼을 나누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이런 하나님의 엄청난 긍휼을 먼저 덧입고 경험하고 나누는 그리스도인들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맛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나누는 자, 하나님의 긍휼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도록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을 닮는 자요 하나님처럼 행하는 자이다.

서세일 목사 / 광주산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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