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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27

 

 

 

 

 

TheSight

    하나님, 전통음악으로 "찬양"하면 안되나요?

악기가 무슨 죈가요? 이제 우리 음악 찬양으로 영광을

모든 창조에는 목적이 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물건들도 모두 각각 그 용도가 다르다. 하물며 하나님이 그 분의 형상대로 신중히 만들어낸 인간일진데, 분명한 창조 목적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 곧 우리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하나님은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을 통하여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비로소 우리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나의 찬송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멋대로 노래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오직 '나의 찬송', 곧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이외의 것에 관심을 돌리거나 자기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관심을 하나님께 향하는 삶의 자세를 가질 때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러야 하는 곡목을 이렇게 지정해 주셨지만 그 부르는 방법에는 제한을 두지 않으셨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보다 그 형식에 얽매여 지나친 자기 주장으로 노래하곤 한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해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다. 새 노래로 찬양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굳어진 마음으로 자신의 경험만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닫힌 마음을 회개하도록 해야 한다.

많은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찬송함에 있어서 음악적인 기교나 아름다움보다도 찬송하는 사람의 자세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었음을 잊지 말자.

 

파이프 오르간은 예배용 악기?

현재 많은 한국 교회가 악기 사용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고 불필요한 율법에 얽매어 있는 것을 본다. 우선 교회 예배 악기의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파이프 오르간의 역사를 살펴보자.

오르간이 교회에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오르간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발전된 것은 16∼17C 바로크 시대이니 오르간이 예배 악기의 주인이 된 것은 불과 300∼400년밖에 안된다.

바로크 시대에 오르간이 발전한 이유는 당시 교회 음악 작곡의 선두였던 하인 리히 슈츠라는 사람이 베이스 음을 중시하는 '게네랄바스'라는 음악 양식을 만들면서부터 였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오르간의 역사성이 아니라 오르간을 성스런 악기로 오해하는 한국 교회의 잘못된 인식이다. 즉, 애초에 오르간은 교회와 상관없는 세속 음악을 위한 악기였고, 이것이 발전되면서 시대와 장소에 따라 교회가 이를 예배용 악기로 채택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오르간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악기인양, 그것이 불변의 진리인양 생각하고, 섹스폰이나 드럼 등은 세속 악기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이다. 예배 악기로 오르간이면 어떻고 인도나 아프리카 교회가 자신들의 악기를 사용하면 또 어떤가? 오르간 수입 경쟁에 불꽃을 튀기는 자태가 그저 한심하기만 하다.

 

아리랑으로 찬송 부르기

다양한 음악 양식의 사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민요나 대중 음악 같은 비종교적인 노래를 가사만 바꾸어 종교적인 노래로 만드는 것은 서양에서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지금까지 즐겨 써오는 '콘트라팍투어'라는 음악 만들기의 한 방법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현재의 찬송가 중에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들이 많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40장)'는 스웨덴 민요이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장)'와 '하늘 가는 밝은 길이(545장)'는 스코틀랜드 민요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405장)'이나 '신자되기 원합니다(518장)'와 같은 찬송은 미국 민요와 흑인 영가이다. 외국 국가도 있다. '시온성 같은 교회(248장)'는 독일 국가이고, '피난처 있으니(79장)'는 영국 국가이다. 또 '전능의 하나님(77장)'은 러시아 국가이다.

기독교와 관계없는 클래식 음악이 찬송가가 된 경우도 많다. 더 놀라운 것은 본래 연애 노래였던 것이 찬송가가 된 예이다. '오 거룩하신 주님(145장)'은 17C 독일의 대중 가요였다. '내마음 안절부절이네, 그 처녀 때문일세.' 그 시절 가사의 첫부분이다.

음악은 많은 부분에서 찬양을 돕고 사랑과 축제를 발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음악 자체가 찬양이며 음악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찬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격히 말하면 음악이란 것은 어떤 대상을 찬양하는 내용물(말이나 글)을 담을 수 있는 수많은 그릇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어떤 음악이 어떤 종교나 이념에 이용 당했다고 하더라도 그 음악이 종교나 이념에 독점되었다고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독교를 맹렬히 비판했던 장자크 루소의 비종교적인 멜로디에 '예수님은 누구신가(94장)'라는 가사를 붙이는 것이나 '주여 복을 비옵나니(61장)'로 부르는 것, 혹은 '주먹 쥐고 손을 펴서'나 '나는 기쁘다(I am so happy)' 등의 동요로 부르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연애 노래도 찬송가가 되었는데 우리의 아리랑이 찬송가가 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왜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요?

이제 와서 그 출신 성분을 가려 찬송으로 수용 또는 배척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또 당장에 새 찬송가를 다시 만들어 아리랑을 곡조로 한 찬송가를 넣고 굿거리 장단의 곡으로 편곡하자는 말도 아니다. 아리랑도 잘 모르면서 어떻게 남의 나라 민요나 국가, 대중 가요들을 비판도 없이 예배 시간에 부르냐는 것이다. 예수 사랑은 나라 사랑이요, 민족 사랑일 수밖에 없는데 자기 문화에는 왜 그렇게 관심도 없느냐는 것이다.

한국 전통음악에는 향락적인 요소만 있지 종교적인 요소가 없다고 단언해 버리거나 굿거리 장단에 '굿'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당이나 굿과 같은 것으로 매도해 버리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죄도 없는 악기를 속물 취급하여 교회도 못 나오게 하는 것은 또 어떻고.

가야금이 기생 악기로, 장고가 무당 악기로 오해받던 때가 있었듯이 오르간도 쯔빙글리, 루터, 칼뱅 같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마귀가 만든 악기'혹은 '악마의 도구'로 혹평을 받던 때가 있었음을 기억하자.

 

이제 이 힘든 싸움들을 그만 두자. 복음의 본질을 고수하고자 무척이나 애쓰는 그 순수함은 높이 평가받을 일이지만, 이단과 사이비가 들끓어 가뜩이나 힘든 지경에 언제까지 우리 안에서 사람의 주장으로 하나님의 뜻을 서로 재고 있을 것인가.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기독교 문화의 많은 부분이 서양 기독교 문화인 것이 사실이니만큼 이제 세계 기독교의 중심에 위치해 가는 우리 나라가 민족 음악을 사랑하는 회복의 바람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정서의 자연스러움이 이 사회에 공감대를 이루며 복음이 깊이 뿌리 내리는 민족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열린 마음이 있을 때에 각 세대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은혜와 감사의 찬양이 이해되며,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높이 올리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김주원 / 마하나임 선교단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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