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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청년들의 참석률이 정체되어 있거나 감소하고 있습니다. 일부가 아닌, 전반적인 현상입니다. 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을까요?

첫째, 괴물 같은 영성에 환멸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현재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위기는 영성의 왜곡과 빈약입니다. 청년들이 싫어하는 영성은 괴물과 같은 영성, 즉 기성 세대의 외식적인 영성과 부정적인 영성입니다. 외식적인 영성은 신앙과 윤리를 거꾸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부정적인 영성은 영적이 된다는 것을 인간성을 부인해야 한다든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고고한 삶을 사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초대 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의 모토였던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자."는 주장과 동일한 것입니다(골 2:16-20). 청년들로 하여금 세상의 직업과 학문의 영역에 영적 전쟁을 치르며 고군분투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하도록 막아 버립니다.

반지성적인 영성도 문제입니다. 오늘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회가 반지성주의에 빠지고 있습니다. 사실보다 개인의 체험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결과적으로 지적 욕구가 왕성한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지식과 신앙을 이원화하든지 지적 혼합주의에 빠지든지 하는 것입니다.

둘째, 신앙의 본질이 잘 전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외형적인 형식들이 잘 상속되고 있을지라도 신앙의 본질, 즉 영적 실체를 전수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의 서구 교회가 텅 비게 된 전형적인 유형을 살펴보면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제1세대는 신앙의 본질과 형식을 다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들의 윤리적인 삶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2세대에 와서는 본질과 형식 중에서 본질보다는 형식을 전수합니다. 여전히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도 하고 생활도 기독교인다운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실체는 없이 단지 영적 형식들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기성세대와의 대화도 단절되고 순종에 한계를 느끼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3세대에 와서는 그 둘을 다 잃어버립니다. 부모의 권위나 친구의 안면 때문에 하던 교회 출석도 그만두게 됩니다. 오늘날 서구 교회에 청년들이 사라진 것은 그들이 세번째의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제도적 교회 생활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앙의 제1세대가 본질도 없이 형식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문제는 훨씬 심각합니다.

이것은 현대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를 교회가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말세의 증후군 중 하나로 경고했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바로 그것입니다. 그 결과가 영적 무기력과 교회로부터의 이탈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고, 신앙의 본질과 형식을 전 인격적으로 전수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교육을 시도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만을 요구하시지 않고 우리의 감성, 지성, 재능, 육체까지 다 요구하십니다.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현대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는 청년들이라면 종교간의 차별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 현상은 기독교를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하기보다는 단지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이해합니다. 이런 청년들은 교회를 떠나가서 무신론자로 자처하거나 이곳 저곳을 배회하는 종교적 순례자가 됩니다.

비록 거짓된 영적 체험이긴 하지만 신비적인 체험은 모든 종교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진리의 상실, 이것은 상대주의의 유령이 청년들의 가슴속에 깊이 파들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 중에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청년들이 많습니다. 가끔 뜨거운 체험을 한 사람 중에도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바른 영적 체험을 못했거나 지적 대답을 얻지 못하고, 지난 1960년대에 유럽에서 유행했던 '예수 체험'과 같은 유사 체험을 한 경우가 많습니다. 즉 예수에 미쳐야 겠다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동기에 의해 믿었을 뿐이지 전 인격적으로 중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청년들은 정직한 대답을 듣지 못할 때 교회를 떠납니다.

넷째, 공동체적 삶에 실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따뜻함과 진지함이 있는 살아있는 삶의 현장을 원합니다.

요즈음 들어 청년들이 부쩍 공동체 순례를 많이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호기심 이상의 그 무엇이 숨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공동체에 대한 아픔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상처투성이입니다. 아직 회복되지 못한 인간 관계의 갈등과 상처가 많습니다. 함께 지낼 수 있었는데도 다툼, 분쟁, 분열 등으로 지금은 낯선 사람처럼 서먹서먹하게 지내고 있는 부서진 관계가 많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저버릴 만큼 문제가 그렇게도 큰 것이었습니까? 같은 주와 영을 섬기는 형제끼리 마치 원수처럼 싸우고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청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컴퓨터 통신망에 잡힌 '토목쟁이'란 이의 외침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나는 내일부터 다른 교회로 갑니다. 장로, 장립집사 임직식에 웬 뒷돈이 돌아야 합니까? ... 얼마 전 교회 회계 보고를 하는데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많더군요. 저는 그냥 조용히 우리 교회를 떠나 방해받지 않고 개인적인 신앙 생활이나 잘하고 싶습니다"(윤환철, "이 젊은이들을 어이할꼬", 「복음과 상황」1995년 10월호)

교회와 사회의 생활의 이중성, 이성교제로 인한 갈등, 감투다툼 등으로 이름만 기독교인이고 생활은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기독 청년들의 삶은 동료들에게 크게 실망을 안겨 줍니다. 말하자면 신앙은 영성뿐만 아니라 삶의 매력, 즉 공동체적 아름다움에서 풍겨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자신과 타인들에게 고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가 실천되고 있는 공통체가 그것입니다. 더 이상 텃세와 분쟁이 없고 불의와 부패가 없는 공동체성이 이 타락한 세상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교회가 교리만을 가르치는 상아탑이 아니라 진리의 실험장이 되기를 고대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라면 '사랑으로 진리는 말하는 교회(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엡 4:15).

다섯째, 예배가 경건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신앙과 교육을 위한 최선의 길입니다. 바쁜 공부와 일손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신앙의 가장 간절한 표현입니다. 형제 자매들을 만나서 교제하고 성경적 인격을 배우는 것은 교육의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날이 갈수록 교회가 예배의 경건성은 잃어버리고 그 자리를 엉뚱한 경직성과 경박성이 대체하고있습니다. 꽉 짜여진 순서, 습관적 반복 행위, 형식적인 고백과 틀에 박힌 기도, 맥빠진 찬양, 전형적인 웅변적 설교 등이 제가 말하는 경직성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시끄러운 음악, 무질서한 박수, 지루한 헌금 순서, 어울리지 않는 유머 등은 경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는 다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근본 이유겠지만, 분위기가 밝고 영적으로 충만하며 경건합니다. 경직되지 않으면서도 경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고 재미 있는 것이 특징이 입니다. 진리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교합니다.

그러나 청년들이 자꾸 떠나는 교회의 설교는 청년들의 고민을 풀어 줄 만큼 지성적이기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슴이 찡하도록 감동적이지도 못합니다. 예배의 갱신이 시급합니다. 이에 대한 대안도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경배와 찬양, 찬양예배, 선교 예배 등을 도입하여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서구 교회에서는 간단한 드라마나 연주회를 설교의 주제에 맞게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예배 시간과 설교를 짧게 줄이기도 하고 아예 청년들만 모이는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현대 문화 속에 사는 청년들일수록 예배만큼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영적 분위기를 원합니다. 물론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하지만 영적 실체가 있는 주일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청년들은 문화적 혜택에 대한 욕구가 큽니다.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는 그렇지 않은 교회에 비래 문화적인 혜택이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각종 시설과 음식까지도 청년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그리고 시설이 편안하다든지 프로그램이 다양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구성원들간의 교제와 소속감이 주는 사회적 이미지도 중요합니다. 문화 시대 속에서 교회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 밖에도 떠날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성인으로서 갖는 각종 고난에 직면했을 때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욕하지 않고도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만한 영적.지적.공동체적인 기초가 튼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방황이 대학과 사회에서 마주친 현대 문화에 대한 충격과 함께 교회를 그만둔 청년들도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깥 세상의 화려함에 넋을 잃어 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팔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교회를 떠날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키고 있는 청년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서울 북부지역에 속한 교회의 약 60%이상의 청년부가 정체 상태로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정체 상태는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을 위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감소 추세로 나아갈 것이 뻔합니다.

한국 교회가 교회 짓고 수양관 짓는 일에 너무 바빠서, 청년들을 키우고 그들을 위한 소프트 웨어 개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30년 혹은 50년후에는 요즈음의 서구 교회처럼 애써 지어 놓은 건물을 팔아야 할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에 강해 설교를 선물한 데니스 레인목사는 지금이 한국 교회의 위기라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성장과 퇴보의 갈림길에 서 있다. 특히 청년들을 감동시킬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으면 한국 교회도 서구 교회를 뒤따를 게 뻔하다."

지금은 청년들이 왜 교회를 떠나는지 그 이유를 분석하고 거기에 대처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 이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그들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고 대답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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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저자인 성인경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대답은 있다'(예영커뮤니케이션)에서 발췌·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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