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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17

 

 

 



 

 

하나님의 이름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 중국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두드러진 다른 점이 있다. 이 세 인종이 함께 있으면 우리는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서양사람은 똑같은 종족으로 생각하고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 겉모습이 비슷하면서도 생각이나,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차이점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다. 세 나라의 하나님을 살펴보면 세 나라의 정신세계에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은 하나님을 '가미사마'라고 부른다. 일본의 가미사마는 6천 여명이 있는데 성경의 하나님도 6천여 하나님 중에 한 명인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지금도 오전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절에 가서 법회에 참석하고 결혼식은 교회에서, 장례식은 절에서 치룬다. 가미사마는 여러 명이므로 고루 섬기고 헌금도 고루 쪼개서 바친다. 6천 가미사마 중 어느 신인가는 진짜겠지 하는 생각일 게다. 그런데 한국인은 오직 하늘님이라는 한 분만 섬긴다. 다른 동양 삼국 중에서 거의 성경의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하나님을 믿어 왔다. 약 100년 전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맨 먼저 성경을 번역했다. 일본에서 하늘님을 번역할 때에는 가미사마의 여러 하나님 중에 한 분이므로 성경의 하나님과는 성격이 달라 번역하기가 난감하였다. 다른 이름은 성격이 맞지않아 할 수 없이 가미사마라 했다. 아프리카나 어떤 나라는 성경을 번역하지 못한다. 그 사람들의 말에는 전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개념없는 하나님을 만들기가 어렵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가르치고 쓰도록 해야 하니 무슨 이름으로 붙여야 할 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세계에는 민족도 많고 언어도 많지만 성경의 하나님과 꼭같은 하나님 개념이 성경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우리 한국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때 카톨릭에서는 천주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하늘님이라 번역했는데 유일신 하늘님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이라고 쓰기로 했다

. 우리의 하늘님에 해당하는 말로 성경에 '야훼', '여호와'가 있다. 그런데 성경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가지여서 성경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혼란을 일으킬 수가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에서의 하나님은 엘로힘이다. 일본의 가미사마의 뜻에 가깝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창 2:4) 이 말씀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붙는다. 천지창조 이야기 중 1장에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사람의 창조가 나오지만 2장에서는 처음부터 사람이 창조된 얘기가 나온다. 1장의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사람과 직접적인 관계가 먼 엘로힘의 하나님이다. 2장의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운명에 직접 관계하시는, 즉 우리의 실존에 관계되시는 하나님이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이 때부터 이미 불렀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셋의 후손들이 부르기 시작하여 창세기 12:8에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제사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은 일본의 가미사마와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우리 나라의 한 분 밖에 없는 하늘님과 같은 의미다.사람들마다 아버지는 있지만 아버지의 이름들은 모두 다르듯이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 이름에 대해 모세가 백성들에게 "어떤 하나님께서 나를 보냈다 할까요"하고 하나님께 묻는 장면이 출애굽기 3:13에 나타나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신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다른 신과는 구별되는 이름이며 지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14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나타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성경의 하나님은 나는 이런 하나님이다라는 설명이 없다. 선포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나 한 군데 설명이 있는 곳이 이 구절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것을 원문에서는 "I am who I will be" 라고 씌여 있다. 히브리어는 현재와 미래의 구분이 없어서 앞 뒤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원문의 구절은 '내가 어떤 하나님인 줄은 지금 말해 줘봐야 너희가 모르고 앞으로 너희가 살아가는 세월 속에서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 보여 준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확실히 그 말씀대로 어떤 하나님인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삶 속에서 보여 주었다.

10년 전 믿던 하나님과 지금 내가 믿는 하나님과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달라진 게 아니라 그 하나님을 믿는 내 인생의 체험이 달라진 것이다. 또 10년 후에 믿는 하나님은 달라질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이해도 체험따라 세월따라 깊어진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15장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온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이 있다. 이스라엘 역사는 그 여호와 하나님이 백성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였는지 그 하나님에 대한 체험, 고백을 보여주시는 기록이다. 같은 사람이지만 죽을 고비를 당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체험이 다르다. 우리들의 삶, 역사 속에서 어떤 하나님이신지 보여주신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출 15:22-25)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물을 깨끗케 하는 나무도 만들어 주셨다. 지구상의 어떠한 병도 하나님께서는 완치할 수 있는 약을 주셨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체험 후에 그들은 26절의 하나님을 체험한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은 야훼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다. 출애굽기 17장에 이스라엘 군대의 신앙고백을 볼 수 있다. 전쟁터에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고백이다.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 17:15-16) 닛시는 깃발이라는 뜻이다. 여호와는 싸움터에서 승리의 깃발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승리의 깃발되시므로 우리는 승리한다는 신앙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사사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면이 있다. "기드온이 여호와를 인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삿6:24) 하나님께서 주장하셔서 종살이하는 우리들에게 평화를 주셨다. 환란 날에 평화를 주시는 여호와 살롬. 하나님만 모시면 우리는 평강을 얻는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므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희망이 끊어졌을 때 에스겔 선지의 고백이 에스겔서 1장에 나타나 있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1절)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4절) 먹구름 뒤의 빛나는 하늘을 본다. 다른 백성은 먹구름만 보고 한탄하고 탄식하지만 에스겔은 먹구름 같이 암담한 현실 그 너머에서 비치는 희망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신앙고백을 한다.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겔 48:35) 여호와께서는 장차 우리가 도달할 그 나라에 계신다. 지금 우리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로 인하여 나라는 망하고 기약없는 수용소에서 절망 가운데 있지만 절망의 먹구름 너머 그 푸른 하늘, 희망 속에서 하나님께서는지금 거기 계신다, 여호와삼마. 하나님께서 미래 속에서 이 민족을 불러낸다. 점점 하나님을 보는 눈이 깊어지고 멀어진다. 그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백성들이 살아갈 때 백성들이 필료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때를 따라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백한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화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14) 아브라함이 궁핍할 때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궁핍, 빈곤과 고통의 날에 필요한 손길을 펴셔서 때에 따라 늦은 비와 단비로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라 한 것이다. 아무리 궁핍할 지라

도 '여호와 이레' 그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에게는 끊이지 않는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3)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다 미약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때에 존귀해지는가? 낙심하고 한숨만 쉬면 보잘 것없는 실패자이지만 그 자리에서 우리가 승리하고 존귀해지는 길은 오직 한가지이다. 바로 존귀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으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존귀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삼상 12:22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라 하셨다. 우리가 하는 행동을 보고 충분히 우리를 버리실 수 있지만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입술로 열심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멘"하고 화답하는 신앙을 가지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난 날에 여호와 살롬, 전쟁 때에 여호와 닛시, 궁핍하고 부족한 날에 여호와 이레, 병들었을 때에 여호와 라파, 절망했을 때에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을 부르며 신앙고백을 하자. 오늘의 절망을 이겨 나가자. 오늘도 우리가 나그네 길을 살아갈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힘써 부르자. 그 이름을 인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힘써 부를 수 있는 나날의 생활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말씀 : 김진홍 목사 (활빈교회 담임목사)
본문말씀 : 출애굽기 3장 13절  극동방송 라디오 예배 : 94. 11.

정리 : 문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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