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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17

 

 

 



 

 

교회교육의 문제점과 대안

'지켜줌'을 위한 교육을 소망하며

교회교육을 생각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생각하는 것이다. '가르치라'는 것은 교회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다. 선교적 명령을 낳는 일에 비유된다면 양육의 명령은 태어난 생명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기르는 일이다. 이 양육의 명령을 들여다보면 크게 둘로 생각되는데 하나는 '가르침'이고 다른 하나는 '지켜줌(observe)'이다. 완전한 양육의 개념으로 주님은 명령하셨고 교회교육의 문제해결의 출발은 '가르침'과 '지켜줌'이 균형을 이루어 나아갈 때 가능하다. 이제껏 '가르침' 위주의 교육이 공교육(Formal Education)이었다. 교회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머리를 향한 교육이었다면 '지켜줌'은 가슴과 손과 발을 향한 교육이다. 주님의 교육철학은 이 둘의 완벽한 조화에 있었다. 우리의 교회교육은 강단은 있었지만 현장은 상대적으로 너무나 부족했다. 현장은 '지켜줌'의 교육철학이 분명할 때 가능하다.

본 소고는 교회교육의 '지켜줌'의 원리가 마땅히 회복되기를 소망하면서 이를 위한 생각들이 현장에서 실현되기 위한 제안을 내어 놓고자 한다.

예수님의 교육원리를 통해 살펴본 '지킴'의 교육. 교회교육의 창시자는 주님 자신이시다. 많은 기독교 교육과 관련한 서적들이 소개되지만 정작 예수님의 교육원리에 대한 언급들은 아예 간과되거나 거의 형식적으로 지나칠 정도이다. 교회교육의 회복을 위한 대안은 예수님의 교육원리에서 찾는 것이 가장 첫째되는 비결임을 확신한다.

 

예수님의 교육 원리로써의 세계관

교육에 관한 일반적인 접근 방법은 교육의 이슈(Educational Issues)를 향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학생의 자질, 교사의 역할, 교육과정의 개편, 교육방법의 개선, 교육평가의 방법 등이다. 공교육에 있어서도 이러한 성향은 농후하다. 그래서 교육이 일관성을 갖지 못하고 피교육자의 불이익만을 초래했다.

교회교육은 이러한 공교육의 영향을 받아 매년 수차례 교사 강습회를 통해 새로운 시청각교재, 공과교습법 등을 배워 가지만 그효과는 너무나 소극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하다.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 유지는 되었지만 변화는 너무나 힘든 과제가 되어 버렸다. 해마다 반복해서 교사의 사명, 교회교육의 중요성 등을 가르쳐도 정작 교사 자신이 버텨내지 못한게 사실이다.

여기에서 조금 더 교육의 문제를 생각한 접근 방법은 교육환경의 요소(Con- text-ual Modifying Factors)를 개선코자 함이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가정을 통한 교육 환경의 변화를 통한 교육 목표의 실현 추구이다. 콩나물 교실의 해소, 첨단 교육교재의 등장 등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 교육은 공교육에 턱도 없이 부족하다. 수백, 수십명의 피교육자가 예배당 안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높여가며 외쳐대는 교회 교육 환경이 현실이다. 교회교육에 투자되는 교회의 예산으로 공교육의 교육환경을 따라가기란 실제로 너무나 거리가 멀다. 예산이 확보되고 환경이 개선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것도 근본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다.

교육의 근본을 들여다 보고 치유를 위한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육철학을 확립하는 일이다. 기독교 교육의 철학은 예수님의 세계관이다. 먼저는 교역자와 교사에게 그리고 학생들에게 근본을 확립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에 관한 예수님의 세계관은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숭배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참된 제자를 양육하는데 있다. (요8:31)

예수님의 교육 원리는 "종교 활동 전문가의 양성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보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의 양육" (F.E.Gabelein, The Pattern of God's Truth) 이다. 이 원리는 우리의 교회 교육 현장에서 무엇보다 빨리 회복되어야 하는 긴박성을 갖고 있다.

 

'지킴'을 위한 새로운 교사들의 양육

당면한 교회 교육의 과제 중 예수님의 교회 원리의 실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예수님의 세계관에 입각해서 교과를 가르칠 줄 아는 교사가 필요하다. 목사와 교사는 분리의 개념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일차적으로 교사로서는 목회자가 양육되어야 한다. 신학교는 종교 활동 전문가를 배출하는 곳이 아니다.

랍비로서의 예수님은 교육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행함의 가르침이었다. 예수님은 위대한 교사의 자질을 축적하는데 30년을 보내고 나누고 베푸는데 3년을 더 필요로 하였다. 이것은 교육의 실제화를 위해 교사로서 목회자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과 투지가 필연적으로 따라야 하는가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신학교의 짧은 생활, 그것도 거의 형식적(?)으로 지나쳐 버리는 기독교 교육의 현장화를 위한 학습은 오늘의 교회를 결과로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피값으로 그의 백성들을 세상 속의 소중한 빛과 소금으로 두셨지만 소금이 소금되는 일과 빛이 빛되는 일을 가르쳐야 할 교육은 짠 맛 없는 소금, 말 아래 감추어진 등불이 되어감을 바라만 보고 있다. 교육의 수준은 소금인데 왜 짠 맛이 없느냐를 질책하며, 왜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지 않았느냐고 외쳐댈 뿐이며 그 책임을 거의 전적으로 피교육자로서의 성도에게 돌리고 있다. 소금의 맛을 내는, 빛을 발하는 원리와 방법을 보여주는 교사 목회자, 교회 학교교사가 양육되어야 한다.

 

학교교육과 교회교육을 하나로 묶는 '지킴'이 있어야

교회교육과 학교교육의 갈등이 체념화단계에 이르렀다.현장의 조사를 통해 얻은 설문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기독교 학교의 경우만 하더라도 30% 이상의 학생들이 교회학교와 학교의 교실학습 사이에서 갈등하고 그들 중의 일부는 심각한 수준으로 조사되었다. 극히 한 부분의 예이긴 하지만 교회교육의 현장이 학생과 성도들의 삶의 현장을 지켜주는 교육이 요청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다음의 이야기는 학교교육의 현장에서 겪는 갈등이 체념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정에 가서는 세상의 학문을 배우자. 이것이야말로 생각이 편협하지 않고 안목과 마음이 넓은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는 길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이중적인 생활이 왠지 어색하고 마음에 걸렸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이러한 생활은 삶의 다양성과 변화를 주는 바람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어느덧 교회친구들을 만나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관하여 눈물을 글썽이다가도 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세상의 용어와 법칙들을 써서 분석 평가하면서 그들과 토론에 열중하는 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이 고백이 기독교 학생들의 현실이다. 젊은 캠퍼스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에드윈 리안(Edwin H. Rian)은 이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 교육이론은 그 가르침이 세계관이자 인생관이지 단순한 교리들의 집합이 아니라는 점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는 노력이어야 한다. 기독교는 모든 삶의 영역을 포함한다. 지식의 모든 영역, 삶의 모든 측면과 이 우주의 모든 사실들을 기독교 안에서 그 올바른 위치와 그 올바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는 세상 전부를 남김없이 포함하는 진리 체계이다." 교회교육의 원리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체념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교회교육과 학교교육의 이중성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의 현실적 도전에 오히려 아무런 대안도 없이 믿으라고만 하면서 그들을 내어 보내고 있다. 교회교육과 학교교육을 하나로 묶는 작업은 교과목에 종교과목을 추가시키는 현재의 교회 교육계의 모습으로는 턱도 없는 생각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교회의 모델은 교회목사로 헌신하고 교회가 예수의 참된 제자를 양육하기를 열망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교회교육의 원동력으로서의 사랑

지켜줌은 간섭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씀이 그의 삶의 고백이 되도록 섬겨주는 일이다. 이 섬김의 근본이 주님께서 보이신 사랑이다. '사랑'을 선행의 하나로 보는 관점들은 많으나 사랑 그 자체를 모든 선행의 원동력으로 삼은 것은 예수의 특이한 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독교를 무수한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살아남게한 힘이었으며 또한 기독교인들이 행하였던 다른 모든 형태의 사랑들에 대한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사랑들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으며 예수의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요, 또한 예수에 대한 전인격적인 신뢰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또한 신앙의 차원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거듭나도록 노력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계명으로써 요구하고 있는데 이때 예수가 요구하는 사랑이란 예수 자신이 제자들에게 베풀어 준 것과 같은 종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들에게 '보여준' 사랑을 이번에는 자신들이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그 스스로가 모범을 보여 주었듯이 소극적으로 어떤 마음의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름으로써만 확보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교육에 있어서 '지킴'의 교육이다.

 

나오면서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교육의 문제 그리고 교육의 환경을 가지고 논하는 것은 더이상 필요치 않다. 이제껏 지상에 공개된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교회교육과 성경교육의 진정한 목적이 "예수꾼"을 길러 내는데 있다면 지금 우리는 그 일을 시작해야 한다.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환경이고 문제 자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뒷걸음질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참된 양육을 위해 주님이 명령하신 '가르침'과 '지킴'을 균형있게 실천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지켜줌"에 있다. 가르쳐진 말씀이 그들의 삶 속에 어떻게 시행착오를 거듭해 가는가를 지켜보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있다.

첫째, 주님의 양육 명령에 헌신된 교사 목회자

둘째, 예수님의 교육원리로써의 세계관을 가진 교사

셋째, 영혼 사랑의 열정에 포로된 교회가 있어야 한다.

이상은 현재 지 교회의 상황에서 교회교육을 회복시킬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다. 최근 들어 감사한 것은 더 멀리 교회의 모습을 그리면서 학교 교회를 소망하며 실천에 옮기는 고백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더이상 큰 건물 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회는 교육의 근본을 들여다 보고 치유하는 교사 목회자와 교사를 필요로 한다. 성경에 나타난 교사 예수의 모습이 당시의 랍비들과 어떻게 달랐는가?(마 19:13-15)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 올 때 어떤 동기에서였는가?(눅 18:15)

교회가 교육하기를 중단하거나 게을리 한다면 그것은 교회로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이다. 다윈(Darwin)의 진화론의 사상이 공교육을 지배하고 진화론적 교육의 결과로 세상을 움직여 가고 있다. 교회는 이것을 교회교육에서 함께 교육하여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굳게 세우도록 요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더욱 분명하게 했던 것과 같다. 먼저 인간은 구원 받고 그런 다음에 성장이 시작된다. 교회교육의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가르치는 것과 함께 "지켜줌"이 있게 하는 것이다. 지켜줌은 예수님의 교육원리로써의 세계관의 확립을 반드시 전제로 한다. 동시에 우리는 다시 더 멀리 바라보는 교회교육의 일들을 지금 병행해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 일에 헌신자와 사명자를 부르고 있다.

글 : 박은식 목사(광주성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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