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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oice21 No.15

 

 

 



 

 


두루마리

본문말씀 : 이사야 48장 1∼11절

 

변남주 목사  어느 한 소년이 나무에 매달린 고치에서 빠져 나오려하는 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안간힘을 쓰는 나비를 보며 소년은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래서 그는 나비를 도우려는 마음에 고치를 찢어 주었다. 그렇게 해서 고치를 빠져나온 나비가 처음엔 잘 날아가는 것 같았으나, 얼마 못가서 땅에 툭 떨어지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나비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소년은 또 다른 곳에서 나비가 든 고치를 발견했다.소년은 '이젠 한 번 지켜보아야지!'라고 마음먹었다. 나비는 꽤 긴 시간과 힘을 들여 몸을 움직이더니 마침내는 고치에서 벗어났다. 이윽고 아무 일없이 훨훨, 하늘 높이 날아가는 모습을 소년은 지켜 보았다. 소년은 알게 되었다. 힘들지만 고치를 빠져 나오는 과정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나비는 날 수 있는 힘을 얻음을 말이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사 48:1)",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세기 15:13∼1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 왜 우리가 고난의 풀무를 거쳐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시편 119편 67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는 여러 가지 고통과 연마가 찾아오는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이스라엘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의 모든 자녀에게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주신다.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한다. 고통과 실패, 사고와 질병은 너무나 아프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어쩔 때는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두가 소중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고난은 어디서 부터 오는 것일까? 누구나 부딪혀야할 고통의 문제에서 우리는 어떻게 신앙적으로 이겨나가야 할까?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다. 선천적으로 눈이 멀어버린 자의 괴로움, 일평생을 보지 못하고 사는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사람은 대체 누구 죄로 인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라는 연민어린 의문이 생긴다. 이 소경을 바라보며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저 사람은 나면서 부터 소경이 되었는데 이것은 부모의 죄인가 아니면 자기의 죄냐고 말이다. 이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것은 부모의 죄도 아니고 자기의 죄도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신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물론 어떤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잘못했을 때, 바른 길로 이끄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역사가 있음은 성경적으로 분명하다. 그러나 질병을 앓는다고 전부다 그런 류의 진노의 결과는 아님을 알아야 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도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계획하시는지를 반드시 알아 보는 것이다. 분명히 고난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대체 이 일을 통해 어떤 일을 하시려 하는지를 꼭 알아보아야 한다. 가령 우리가 어떤 전염병에 걸렸다고 하자. 전염되는 병균에 감염되어 걸렸다는 사실을 사건의 근원이라고들 한다. 다른 예로 내가 어떤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 하자. 상대방의 실수로 상대방의 차가 내게로 부딪혀서 사고를 당했다. 이 또한 근원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원인이 아니다. 절대적인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의 삶 전체, 세세한 부분까지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기 때문에 병이나 고통의 원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의 자녀에게 고난, 질병, 역경 따위가 절대로 다가올 수 없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주실까? 그것은 세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만을 찾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인생은 너무도 짧기만 하다. 본인은 세상의 많은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공작 선인장이라 여긴다.

아침 동쪽에서 햇볕이 떠오르고 햇볕을 향해 피어있는 그 때가 꽃의 가장 아름다울 때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꽃도 하루를 넘기진 못한다. 365일 가꾸어도 하루 밖에 꽃을 피울 순 없다. 인생도 그러하다. 인생이 아무리 호화스럽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할지라도, 꽃과 같이 잠깐 피고 지는 모양과 같다는 것이다. 인생은 그렇듯 잠깐이다. 이런 인생인데,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세상의 부귀 영화만을 좇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의 잘못된 방향을 올바르게 잡아주기 위해 우리에게 고난과 환란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고난이나 환란을 쉽게 수궁하려 들지 않는다.(시 119:61) 그래서 상대방의 실수로 혹은 자신의 부주의 등으로 원인을 찾는데 그치고 만다. 이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올바른 인식이 아니다. 이런 식의 사고는 끝없는 원망만 낳을 뿐이다. 또 서로에게 잘잘못을 떠넘기고 미워하는 결과만 낳고 만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역경을 원망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려고 하신다. 이때 우리는 삶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게다.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고난이나 역경을 믿음 안에서 잘 수용하여 잘 해결해 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목적 없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진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으신다. 맨 먼저 우리는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 놀라우신 사랑과 계획으로 생각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감사할 수 있고 영광도 돌릴 수 있다. 우리의 고난을 결코 우연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고난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하며 고난에 수긍해야 한다.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이사야 48:10)" 여기서 '고난의 풀무'를 역사적으로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가 70년 동안 있었던 것을 가르킨다. 그 70년 동안의 바벨론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바벨론에서의 70년은 엄청난 고통의 세월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무서운 풀무에서 백성들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잘사는 데 나는 왜 이래야만 하는가, 왜 나만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가라고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고난을 아주 괴로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이상한 생각이라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고난이 찾아 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부정해버리고 원망함은 우리의 영혼에 크나큰 상처만 안겨 준다. 그러나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고난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찾아오는 고난, 질병, 역경을 괴롭게만 생각한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어떻게 고난을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우리는 고통과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겠다. 역시 올바르고 바른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끈질긴 사랑을 소유하면, 결코 시험은 원망의 대상이 아니다. 시험은 도리어 우리의 기쁨이 되고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믿고 따르는 자녀는 결코 삐뚤어지지 않는다. 부모의 채찍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자녀는 결코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계속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잘못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난의 바람이 아주 세차게 불어도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에 대한 끈질긴 믿음이 있으면 이 시련은 기쁨이 될 것이고 은혜가 될 것이며 축복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인류의 사랑 중에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마지막으로 인간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숙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면서 놀라운 신앙 성숙을 해야 한다. 순수한 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뜨거운 용광로가 필요하듯,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우리에겐 고난의 용광로가 필요하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세상에서 커다란 곤난을 당했다. 그러나 이때 욥은 고난 즉,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니' 하는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정말 욥같이 고난을 당한 이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욥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누구나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실패나 낙망, 또는 일평생 동안 그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난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단련해서 정금같이 나오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나를 다스려야 한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감사해하고 사랑이 가득 찬, 그리고 거룩하며 더욱 화목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손색이 없는 그런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참뜻을 안다면 우리는 고난의 풀무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이들이 될 것이다.
 

말씀: 변남주 목사(광주 서현 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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