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4월말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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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정보 6 ; 97년 4월말 상황 >
수집시기.장소.방법 : 97년 4월 17일-5월 1일,
연길시,도문시,화룡현,용정시 중조 접경마을 .
북한탈출식량난민 5명 인터뷰, 북한식량난민
보호하는 조선족 2명 인터뷰, 북한방문하고 4월 18일
돌아온 조선족 1명 인터뷰, 두만강변 북한접경
조선족마을 방문기. 기록일 97년 5월5일. 수집자 ;
통일강냉이 k.
1) 어머니 엎고
두만강 건넌 청진 청년
* 수집자 주 ; 97년 4월 18일 오전 중국 연변자치주
용정시 조양천, 외딴집 오막살이 흙집 과수원에
숨어 있는 모자를 첫 대면하였다. 허약한 몸집에
온 몸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남루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아들(이름 0도0, 68년생, 3년전 인민군 제대,철도전문학교
졸업), 밖으로 구멍이 뻥 뚫린 흙 방바닥에 온
몸이 퉁퉁 부어서 신음하는 예순세살의 홀어머니,
이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었다. 어머니의
목을 통해서 가슴속으로 부터 들려오는 깊은
가래끓는 숨소리, 머지않아 숨을 거두실 것 같은
느낌...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로 부터 포위되어
버림받은 인간, 초라한 인간의 전형처럼....내
영혼은 거기서 그리스도를 보았다. 나는
신음하며 울었다. 강풍에 깜박거리는 촛불과
같이 위태한 생명들... 이곳 외딴집에 도착한지 10일째,
10일 동안 아들은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어머니에게 죽을 쑤어 먹이고, 올해의 양식을
위하여 과수나무 사이의 빈 땅을 뒤집어 감자와
옥수수 씨앗을 파종해 놓고 있었다. 청진에서
부터 중병(심장병)에 걸려 있었던 어머니는
차가운 겨울 밤 바람을 쐬며 강을 건던
탓이었던지 병세가 악화 되어(간염,신장염,뇌혈증
등 합병증세가 나타남) 몸을 가누지 못하였고
생명이 위독한 형세였다. 치료비도 없는데다
사람 눈을 피해 쫓기는 사정이어서 자포자기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수집자가 보다 좋은
장소로 옮길 것을 제안하여 이들 모자와 새로운
장소에서 10일간 숙식을 함께하며 병 치료를
해주고 북한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의 병세는
약을 쓰자마자 놀라울 정도로 급속히 호전되어
사흘째 되던 날 걷기 시작 하였다. 수집자는
이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도움과 양식을 제공 할
것을 약속하였고, 자기 땅과 고향! 조국으로
되돌아가 현재의 고난을 함께 받고 극복하기를
권하였다. 예수믿는 이에게 은혜를 입었다며
성경책 한권을 소중히 받아들고서, 다시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겠다며 이들 모자는
내몽고로 간다고 길을 떠났다.
* 아들의 증언 ; 제가 어머니를 엎고 두만강을
건넌 것은 97년 1월 28일 새벽 5시경 이었습니다.
군대생활 10년경험으로 아침 동이 트기 바로 전
시간이 병사들 근무태도가 제일 느슨해 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중간 지점 10미터 폭만 빼고
강물은 모두 얼어 있었는데, 그날 날씨가 아주
추웠습니다. 아마 영하 20도 정도 되었을 겁니다.
강물이 허리 까지 밖에 차지 않았어요. 중국쪽
강변으로 건너니 언덕이 상당히 가파랐는데
어떻게 그곳을 어머니를 엎고 올라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에 젖은 몸으로 한
집의 문을 두르렸는데 조선족 가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놀란 듯 하더니 한눈에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급히 집안으로 맞아들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삼합이었습니다.
3년전 군대생활 10년을 마치고 제대 했는데,
군대에 있을때는 밖의 식량사정이 이렇게 까지
어려운 줄 몰랐습니다. 오래전 부터 배급할 쌀
대신 쌀 몇 키로라고 표시한 종이쪽지만 주니
살아갈 길이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제가 3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여동생과 나를
혼자서 키워야 했습니다. 여동생은 3년전
청진에서 열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우리가정은
아버지의 성분이 좋았던 덕분에 북한에서 비교적
좋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하루 세끼를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작년
부터 사정이 급격히 나빠져, 조선에 이대로 눌러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는 확신만 생겼습니다.
어머니와 의논한 끝에 목숨을 보존하려면
중국으로 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유일한 재산인 집을 96년 12월 말 조선돈 1만원에
팔았습니다. 그 돈으로 피난 보따리를 만들고
쌀을 사서 밥을 지어 어머니와 함께 양껏
먹었습니다. 굶다 못해 우리 처럼 집 까지 팔아
먹은 후 집 없이 거리와 역전을 떠도는 사람들이
청진에만도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95년에 한 가족 전체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부부는
‘죽더라도 밥이나 한번 실컷먹고 죽어보자’며
집을 팔고 쌀을 사서 밥을 양껏 해놓고
어린애들과 같이 둘러 앉아 실컷 먹고...., 밥에다
쥐약을 탔는데 어린아이들은 약 탄 지도 모르고
부모들을 따라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청진시에는 95년 부터 파라티푸스와 장티푸스
라는 전염병이 돌아 지금까지 수천명이
죽었습니다. 병이 걸려도 약하나 없어 먹어
보지를 못한 채 죽어 갑니다. 내가 사는 구역
산등성이에 공동묘지가 있는데 근래들어 새로운
묘지가 너무나 많이 생겨 묘지 골짜기가 되다
싶이 하였습니다. 청진역에서 기차를 타고
회령까지 왔는데, 기차도 언제 출발하고
도착하는지 시간이 제대로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전력사정과 잦은 고장 때문에
청진역 기차시간 안내판에는 분필로 ‘도착시간
12시간 지연’ 이라 다가는 잠시 후 다시
‘도착시간 미정’이라고 쓰는 식으로 전
구간에서 오는 열차가 이런 형편입니다. 열차를
타려면 무작정 역에 나가서 기다려야 합니다.
열차가 한번 도착하면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당기고 하면서 서로 타려고 난리다 보니 문으로
타는 사람보다 창문으로 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기차역에는 무릎을 쪼그리고 옆
사람과 딱 맞대고 앉아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어린이들이 많다)이 밤낮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다 쪼그리고 앉은 채
굶어서 죽은 사람이 매일 아침마다 세명씩은
나옵니다. 안전부 요원들이 와서 비닐로 둘둘
말아 질질 끌고 어디론가 가져 갑니다. 회령까지
올때 타고온 기차는 유리창이 한장도 없었고,
내부는 의자도 없이 그냥 맨바닥 이었습니다.
회령에 도착해 집 팔아서 가지고 온 돈으로 떡을
사서 어머니와 실컷 먹었습니다. 회령 장마당에
나갔는데 청진 처럼 꽃잽이 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꽃잽이란 집과 옷 등 모든 것을
팔아먹고도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떠도는 어른이나 어린이들을 일컷는 말입니다.
이들은 대개 남의 가게나 식당 등 아무곳에서나
먹을 것이 있으면 잽싸게 훔쳐서 목구멍으로
넘기기만 하면 일이 성공하는 사람들 입니다.
먹을 것을 훔친 후 음식주인으로 부터
맞으면서도 일단 입속에다 구겨넣는데 성공하면
행복해 하는 사람들 입니다. 이런 꽃잽이들의
입속으로 음식이 빼앗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장에서는 아무리 작은 먹을 것 하나를 놓고
파는 사람들도 요즘에는 음식 위에 그물을
쳐놓고 팔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꽃잽이들은 이전보다 조금 발전하여 어떤 사람이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입술
앞에서 훔쳐서 얼른 제 입에 넣는 형태로 발전을
했습니다. 회령시장에서 떡을 사서 먹는데 한
어린아이가 애원하는 눈 초리로 떡 한조각을
달라고 바라 보던 생각이 납니다. 그 아이를 함께
이곳(중국)으로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이 내내
후회 됩니다. 회령시장에서
목격했는데, 한 어린아이 꽃잽이가 다른 사람
입에 들어가려고 하는 음식을 훔쳐서 제입에
넣는데 음식주인이 왼쪽 볼을 치자 음식이
밖으로 튀어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
꽃잽이는 흙 묻은 음식을 얼른 다시 입속에
넣었습니다. 오른쪽 볼을 다시 치자 음식이 다시
튀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다시 입으로
집어 넣어 끝내는 목으로 넘겨버렸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제 앞에서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는데
결국은 죽었습니다. 안전부 사람들이 와서 그
사람 시신을 천에 둘둘 말아 치워 가면서 하는
말이 “이런때 꽃잽이를 해서라도 먹고 살아야지,
죽는 놈만 바보다”라고 하는 것이 었습니다.
회령에도 장티푸스와 파라티푸스를 앓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비교적 잘 사는 형편에 속했기에 큰 고생은 하지
않은 편입니다. 창피해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딱 한번 진흙떡을 먹은 적이 있는데,
군대생활을 하던 중 도로공사를 하는데 부드러운
진흙이 나왔습니다. 하도 배가 고파서 남이 보지
않게 몰래 진흙을 한줌 쥐어 먹었는데, 글쎄 뭐
위장이 가득차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청진 집에 살때 하루는 옆집(안전부원 집)
구정물 통에 쉰 쑥떡 세 덩어리가 떠 있는 것을
어머니가 주어다가 깨끗이 씻어서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쨋든 우리는 잘 사는
편이었습니다.
2) 함북
세천에서 온 부부
* 수집자 주 ; 아내 0춘0, 24세, 황해도 사리원.
남편 0해0, 30세,함북세천. 아내되는 0춘0씨는
파라티푸스에 걸린 남편의 병 치료와 먹여
살릴길이 막막하던 중, 세천을 자주 드나들던
중국조선족 정0철씨의 제의를 받았다.
북한처녀를 중국으로 데려다 주면 한명당 미화300불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0춘0씨는
회령역전에서 밥도 먹지 못하고 꽃잽이 하는
북한처녀들에게 중국에 시집가면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설득해 10여명을 중국으로 내보냈다. 0춘0씨는
어쨋든 굶어죽을 바에 중국으로 가서 목숨이나
건져라는 생각으로...이것은 여자들을 돕는
길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이 일은 두만강
얼음 위를 건너다 총 맞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0철씨로 부터 약속한
만큼의 돈 조차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0철씨에게 돈 많은 중국인에게
자기를 팔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몇일밤 색시
행세를 하다가 돈 가지고 북한으로 튈 계산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팔려간 곳은 길림성의
가난한 농촌 총각의 집이었다. 정0철씨가 인민페
5천원을 주고 그녀를 진짜로 팔아넘겨 버린
것이었다. 파라티푸스를 이겨낸 후 남편 0해0씨는
아내를 찾던 중 아내가 중국으로 팔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3월19일 부인을 찾으러 중국으로
월경하였다. 수집자는 남편 0해0씨를 돕고 있는
조선족 김00씨에게 돈을 주어 함께가서 길림성
농촌으로 팔려간 0춘0씨를 찾아 오게 하였다.
위험한 일이 었지만 4월 24일 오전 밭에서 일하고
있던 0춘0씨가 남편을 알아보고 달려오자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태워 도망해 나왔다.
밭에서 일하고 있던 남편(돈주고 0춘0씨를 샀던)마을
사람들이 농기구를 들고 떼몰려 쫓아 왔지만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다. “돈 한푼 없이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북한으로 돌아가면 사람을 팔았다고 처형될 것이
뻔한데...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아내 0춘0씨는
버텼다. 이들에게 집과 땅을 살 돈을 마련해 주고
성경책 한 권을 들려주었다. 이들부부는
중조변경지역을 벗어나 흑룡강이나 신강으로
가겠다며 4월 26일 길을 떠났다.
* 남편증언 ; 지난해(96년) 11월말 부터 시작한
파라티푸스를 97년 1월 말까지 앓았습니다. 꼬박
60일 동안을 앓았습니다. 정말 죽게 되었는데, 제
아내는 자신도 역시 파라티푸스를 앓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황해도 사리원의 친정집에서 부터
세천(함경북도)까지 와서 저를 간호하여 살려
주었습니다. 제가 파라티푸스에서 완쾌되기 몇일
전 아내는 저와 장인 어른에게 조선돈 5만원을
주며 사리원의 친정집에 가서 당분간 살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인어른과 저는
사리원으로 함께 출발하게 되었는데 청진에서
장인어른이 돈 보따리를 들고 혼자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돈이 한푼 없게 된 나는 할 수 없이
꽃잽이가 되었습니다. 사리원에 도착했을때는
입고있던 옷까지 팔아버린 상태여서 속옷
바람으로 처가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장모님은 내 꼴을 보고 우셨습니다. 집에 들어가
보니 장인어른이 계셨습니다. 왜 저를 버리고
혼자서 도망을 쳤는지 물었더니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장인어른은 죄책감을 못 이기고 집안에서
목메달아 자살을 하였습니다. 살려보려고
병원에까지 같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고,
나는 안전부에 끌려가 몇일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장인어른의 장례를 치르고
사리원을 떠나 다시 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천에 돌아왔다가 처형을 만났는데 아내가
중국으로 일하러 갔다가 팔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는 내 아내를 내가 죽어갈때
살려준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찾아내어
구출하겠다고 마음먹고 한달 전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내가 건너올 당시 세천은 형편은
작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굶어서 죽고
있었습니다. 세천은 탄광지역이라 함북도 다른
지역보다 식량곤란을 더 받는 곳 입니다. 인구가
3천세대(11,000명정도)쯤 되는데 작년에만도
굶어서 죽은 사람이 1천명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나올 당시에는 하루 최소 7명, 보통 10명씩
죽었습니다. 먹을것이 없어서 콩깍지를 갈아서
먹거나 진흙떡과 백토(하얀흙)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조금 나은 사람들은 진흙에다 옥수수
가루를 조금이라도 뿌려서 먹고, 없는 사람들은
그냥 흙만 먹었습니다. 이것을 먹고나면 똥
구멍이 막혀서 서로 똥 구멍을 파주느라 고생을
하고, 항문이 파열되어 병원에 갔다가 죽기도
하고.... 이대로 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텐데,
인구 절반도 더 죽을 겁니다. 콩깍지를 가루로
분쇄하여 뜨거운 물에다 끓여 죽을 쑤어서 한
일주일간 먹었는데, 얼마나 속을 후비던지 큰
고생을 했습니다. 세천은 산골이라 의료수준이
형편이 없습니다. 우리 부부도 아이 둘을
낳았는데, 산후 조리를 잘 못했던지 앓다가 둘 다
죽었습니다. 두번째 아이도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작년 11월에 죽었습니다.
3) 회령에서 온
16살 소녀(0영0. 81년생) 증언
97년 2월 26일 중국땅으로 들어 왔는데, 식량이
하도 바빠서 였습니다. 요근래의 양식배급은
김정일 생일날에만 4식구 몫으로 1.1키로를
받았습니다. 중학생은 500그램,소학생400그램,일이없는
사람은 300그램 입니다. 먹지 못해 굶어죽는 사람
많습니다. 실제로 본 적도 있는데... 우리
친할머니도 잡수지 못해 돌아가셨습니다.
외상으로 술이랑 받아다가 장례를 지냈습니다. 3년
전에는 잇밥은 못 먹어도 옥수수 밥은 먹었는데,
지금은 낱알을 통 구경 할 수가 없습니다. 마른
콩 깍지를 갈아서 물에 타 먹고 살았습니다.
지난번에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한번 붙잡혀
갔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일주일 구류살고
나왔습니다. 감옥에도 먹을 것이 없어서
어지간한 사람은 그냥 풀어 내놓았어요. 그런데
엄마 아빠가 다시 중국으로 달아나라고 해서
다시 나왔습니다. 이곳(중국개산툰)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밥 먹을때나, 음식을 보면 엄마 아빠가
배를 골고 있을 것 생각하니 더욱 생각이 나고....
그래서 과자하고 옥수수를 얻어가지고 배낭에
가득넣고 두만강 얼음을 건너 가는데 북한
국경경비대와 마주쳤어요. 지고가던 것 다
버리고 다시 중국쪽으로 건너와 뛰어 달아나는데,
북한병사들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계속 달렸어요. 이때 마침 트럭을 몰고 지나가던
조선족 운전수 아저씨가 차에 태워 구출해
주었습니다. 엄마,아빠도 이곳으로 탈출해
오겠다고 했는데, 온 다는 날짜가 벌써 지났는데
무소식 입니다.
4) 북한과
변경무역 하는 조선족 0죽0씨 증언
같은 민족이라 이들의 처지를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설사 이들이 러시아인 이라 해도 나는
이들을 도왔을 것입니다. 중국 정부에서
양식구하러 넘어오는 북한 사람들을 접대하는
조선족들에게 얼마전 부터 벌금을 물리니
북한사람들은 더욱 심각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마을들에 이야기 해서 양식구하러
오는 분들 있으면 도울테니 연락달라고 해서 이
북한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시작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15명 정도 도왔는데, 이들은 처음
건너오면 온 몸에 이가 가득합니다. 또 음식을
주면 음식을 받지 못해 설사를 합니다. 옷에다
그냥 다 싸버립니다. 처음에는 밥을 보자마자
눈에 불이난듯 덤벼들어 허겁지겁 많이 먹습니다.
그러나 몇일 후 부터는 지속적으로 잘 먹지
못하는데, 몸이 갑작스런 변화를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때 이
고비를 넘기면 좋아집니다. 북한 식량문제는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심각합니다. 정말
이들은 풀과 나무만 먹고 삽니다. 97년 2월 황해도
사리원에서 부터 온 김0화(여)씨를 보살폈는데,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사리원 길거리에서 길을
가다보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갑자기 퍽퍽
쓰러져 죽는다. 그래도 아무도 널 부러진 시체를
돌아보지 않는다.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안전부원들이 트럭을 가지고 다니며 죽은
시체들을 수거해 트럭에 싣고 묘지로가
집단매장을 해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역거래 때문에 어떤때는 하루에도 몇번씩
북한과 중국을 오가기도 하는데, 회령역에
외지에서 기차가 도착하는 것을 보면,
객차위까지 사람이 새까맣게 올라있는 것이
보통이고 한대가 도착하면 보통 8명식의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나옵니다. 누가
옆에서 굶어 죽어도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죽어가면서도 밥한술만 먹어 보았으면
합니다. 양식을 구하러 온 탈북자들은 먹는 것
외에 다른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외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중국땅에 들어 왔으니
이제 우리는 만세다라며, 오직 밥만 먹을 생각만
합니다. 이런 처지자 이들은 취직 시켜주면,
이들을 부리는 중국인들은 때리고, 천한일만
시키고 학대합니다. 정말 밥만 먹여주고 임금을
한푼도 안주는 식입니다. 요즘에는 탈북자 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면 북조선으로 부터
미화300불씩을 상금으로 받기 때문에 조교들,
화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96년 11월 12일날 삼봉(함북)의
공중변소에 갔다가, 대변을 보다 허기에 지쳐
죽는 사람을 직접 보았습니다.
5) 얼굴이
비치는 멀건 죽
그 청년은 97년 2월 설날에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우리집에 와서 매일 밥만먹고
잡만 자는데, 밥 먹는 양이 너무 대단합니다.
집에서 놀다가도 시간만 나면 부엌에 들어가
손으로 맨밥을 집어서 먹습니다. 집안에 무슨
먹을 것이 생기면 모조리 먹어버리는 통에
우리집 얘들과 자꾸 싸움을 했어요. 북한에서
무엇을 먹었는가고 물어보면 풀, 나무껍질을
재료로 넣은 ‘얼굴이 비치는 멀건 죽’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탈북식량난민을 도왔던
조양천의 한 조선족 아줌아 증언-
6) 어린아이
셋의 죽음(인육사건)
내 전보를 받고 북청에서 부터 온 친척을
회령에서 만났다. 그간 잘 지냈는지, 그곳 형편은
어떠냐고 물었다. 다른 말은 하지를 않는데,
그동안 강냉이 속대를 갈아서 끓인 죽을
먹었다고 말하며, 거기에 덧 붙여서 ‘곡식
낱알을 구경한지 너무 오래라 낱알을
받으면 몸의
감각이 어떨런지’ 하며 울먹거렸다. 해간
찹쌀떡을 주었더니 먹고는 너무 기뻐서 이제는
북청까지 걸어갈 수 도 있다면서 행복하게
떠나갔다. 회령시내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4월
17일) 연길로 돌아오려고 하던 중 회령사람들이
한 부부의 화형식 집행을 보기 위해 강변시장에
가득 모인 것을 보았다. 그곳에 가서 들은 내용은
너무나 끔찍한 것 - 화형을 당하게 된 부부가
회령역에서 꽃잽이를 하던 영양실조에 걸려
비틀거리는 10세가량의 어린이 세명을 유인하여
옥수수 죽을 실컷 먹였다. 죽을 먹고난 아이들이
음식에 취해 모두 잠들었을때 이들 부부는 이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고 토막 내어 삶은 후,
고기는 소고기,나귀고기라 속여서 팔고 창자는
순대를 담아서 팔았다. 날씨가 따뜻해 오래동안
보관할 수 없게 되자 이들 부부는 남은 고기를 한
식당에다 한꺼번에 넘겨 팔았다. 고기를 이상히
여긴 식당주인에 의해 신고가 들어갔고 안전부의
조사에 의해 사건전모가 밝혀졌다고 함 -이었다.
이 사건은 전 회령시내에 공개화 되었기에
사실임에 틀림없다.
-식량전달차 북한을 방문하고 4월18일 돌아온
조선족 정00씨 증언-
7) 두만강변
중국 조선족 마을 소식
매일밤 마다 밤 손님(양식구걸하러 오는
북한사람)이 오지 않는 날이 없다. 주로 마을
외곽지역의 집에 많이 드는데 변방을 지키는
북한병사들도 자주 온다. 한 집이 인심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 북한마을에 소문이 나서 계속 그
집에만 손님이 많아진다. 찾아가 본 한 조선족
집은 너무나 밤 손님이 많아 옷과 곡식을 다 준
나머지 갈아 입을 옷 조차 없었다. 우리가
방문하기 몇일 전 5개월된 임산부가 가슴까지
차오는 얼음장 처럼 찬 강물을 건너서 오기도
했다고 한다. 밤 11시 이후에 개가 짖으면 이제는
북한의 밤 손님으로 당연히 생각한다. 밥도
해주면 혼자서도 밥솥 하나(5인분용)를 다
먹어버린다. 그리고 혹시 남으면 밥까지
호주머니에 넣어서 가져간다. 그러나 이들이
남기고 가는 것은 이 뿐이라고 한다. 연변자치주
화룡현 숭선-남평지역의 마을들을 조사한 결과
이런 사실은 아주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요즘들어 중국정부가 이들을 맞아들이는
집에 대해 벌금(오천원)을 부과하겠다고 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따라서 이들의 마지막 희망인
‘밤 손님’이 되는 것 조차도 비극으로 결말날
가능성이 점점 높아가고 있다. - 4월말 주간의
조선변경마을 탐방결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