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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21.com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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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호 커버스토리 안내


대학문화를 주름잡는 개인주의 상대주의 다원주의... 도전해오는 주류 세속문화와 시대정신에 대응하는 크리스천 대학생들의 모습을 돌아보고,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대응 방식을 찾아보았다.



index

데스크칼럼 : ‘많이 고민했다’는 것은...

커버취재 : 당신은 어떤 유형입니까?

커버진단 : 눈감으면 코 베가는 대학, 눈감고 코 내주는 크리스천?

인터뷰 1 : "예수는 사생아 출신 민족 영웅이야"

인터뷰 2 : 신념과 학문은 둘이 아닌 하나

지상대담 : "홍길동, 대학에 가다" 역자 김성현씨(GSF 협동간사) 인터뷰

커버논단 : 현대 문화 속의 그리스도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커버자료 : 도전해 오는 시대 정신, 현대성의 4가지 세력들


■ 데스크칼럼


'많이 고민했다'는 것은...


voice21 편집장으로서 기자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크리스천은 고민을 합니다. 크리스천이라면 고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치열하게 살면서 끊임없이 고민하십시오. 고민한 흔적을 기사를 통해 보여주십시오…." 그래서일까? 우리 기자들은 고민이 참 많다. 이런 저런 잡다한 고민들부터, 보기에도 거창한, 그런 수준 높은 고민까지 하면서들 산다. 쓸'고'(苦) 번민할 '민'(悶)... 고민하는 삶은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다. 그러나 자꾸 말하지만, 크리스천은 고민을 하면서 살수밖에 없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지만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벌써 이 문장 자체가 고민스럽기 그지없다.)

통 고민을 안 하며 사는 것 같았던 후배들이, 요즘은 툭하면 "고민중"이라며 머리를 싸매고 빨간신호등을 켠다. 나 지금 고민 중이니 건들지 말라는 것이다. "어라?" 그럴 때면 교만한 나는 이번엔 그가 도대체 뭘 어떻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고민을 안 하고 사는 사람들 때문에 고민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그들이 고민을 시작한다 하니 또 다른 고민이 생긴 것이다. 이제부터는 고민을 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어떻게 고민하느냐가 문제인 셈이다.


흔히, "고민한다"는 것은, 그 사고의 흐름이 발전적이고 정당한 방향으로 개선되어 가기보다는, 자꾸 오래된 사상들, 즉 인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철학과 가치관과 사상의 흐름들 중에서 적당한 답을 찾아, 그 흐름에 확 휩쓸려 가는 것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고민함이라는 과정이 언제나 우리의 올바른 이성과 제대로 된 판단력에 의해 이끌어지고 진행된다면야 상관이 없겠지만,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그저 막연히 "우리가 좋은 결론에 이를 것이다"라는 환상에 빠져있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 내리기 위해서는 성경적 세계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그만큼 정립된 세계관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데 언제나 문제가 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준과 동기가 되어야 할 하나님의 법칙이 마음과 정신을 꿰뚫고 있어야 하건마는,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쉽게, 그 결정권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잡다한 세속 정신과 사상과 전통의 거대한 흐름에 맡겨버리고 마는 것이다. 성경대로 한다고 하면서 결과는 자율주의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주위에서 안타까운 사례를 종종 접했으리라 생각한다.


"고민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하자. 우리가 "많이 고민을 했다"는 그 사실만으로, 결과를 너무 믿지 말자.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타락한 존재로서, 손상된 이성, 불완전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지하고, 늘 고민함의 과정 속에 틈타기 쉬운 세속 사상과 인본적 가치관을 떨쳐버려야 한다. 이를 위해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늘 필요한 것은 '계시 의존 사색'의 변함없는 원리인 것이다. 오직 성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맥을 찾아, 그에 따라 그만큼 사고하는 것이 우리의 지적 활동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그 원리에 따라 우리는 고민의 결과를 검증하는 기준을 세워야 하며, 그것은 곧 교회 공동체에 최종 결정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된다. (물론 당연히 그 교회가 진리 안에 바로 서있는 교회일 경우.) 상황 판단에의 최종 결정권이 자기 개인에게 있다고들 말하는 것은, 그것이 결국은 그렇게 되고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며 그렇게 말을 해 왔던 것뿐이지, 실은 결정권이 공동체에 있으며 교회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율주의는 언제나 성공할 수 없으며, 그것은 곧, 진리에 대한 반역이 된다.

황희상 편집장


■ 커버취재


당신은 어떤 유형입니까? (파트1)


대학의 토론문화 속에서 크리스천의 대응 방식


일반 기독 대학생들의 경우 성경적인 원칙에 대한 확고함이 없다. 따라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다원주의에 물든 대학내 커뮤니케이션 문화 속에서 크리스천의 대응방식은 곧 그들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토론문화에서의 그들의 다양한 문화적 대응방식을 유형화했다.


학문의 전당이라고 불리는 대학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모든 학문은 실용성의 잣대로 판가름난다. 쓸모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진리가 되기도 하고 비진리가 되기도 한다. 대학에서 영원한 진리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진리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학의 우상이 되어버린 실용성은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다원주의 등 현대 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현대성으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양상은 말 그대로 문화가 되어 대학생들의 삶 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들의 사상을 지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크리스천들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진리가 하나라고 믿는 크리스천들은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여기에도 진리가 있고 저기에도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무엇이 진리인지도 흔들리고 있다. 대학 크리스천들의 이러한 양상은 대학 내에서 이루어지는 갖가지 토론문화 속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업 중에 이루어지는 토론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크리스천은 혼란과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이 이러한 문화에 어떻게 적응하며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특별히 인터뷰 대상자들의 이름과 사진은 생략했다. 일부는 그들이 원해서였으나 기자의 임의로 모두 생략했다. 약간의 각색을 거치기 위해서.


유형 1 침 튀는 크리스천


김광팔 (모대학 철학과 4학년 26세)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를 가지고 당당히 맞선다. 그것이 크리스천!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선교사의 비전을 품어왔다. 그래서 대학교 1, 2학년 때는 예수전도단에 들어가 활동했다고 했다. 순간, 잘못 짚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선교활동을 하느라 그 안에만 머물러 살았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상상했던 대로 그는 1, 2학년 때는 다른 학생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그가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학과 일에 잘 참여하라'는 것이다. 왜? 학과 일에 무관심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하고 설득하는 데 있어서 설득력을 갖기 힘들기 때문에.

철학과라는 특성상 그는 수업시간에 자주 토론을 하게 된다. 그는 철학이 "신학과 가장 비슷한 학문이면서도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다른 면에서는 신학과 가장 배치되는 학문"이라고 소개한다. 그래서 수업시간마다 크리스천과 교수님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게 된다고 한다.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이다.

1, 2학년 때 그는 열을 내면서 싸웠다. 그가 자신의 성격이 "대책없는 유형"에 해당된다고 말할 정도이니 얼마나 침을 튀면서 이야기했을 지는 상상이 간다. 문제는 처음에 그에게 적극적인 동조를 해 주던 다른 크리스천들이 점점 시큰둥해지더라는 것이다. 그 때에야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크리스천들의 배반(?)에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혼자서 매던 총대를 이제 내려놓고 그는 다른 결심을 했다.

"사소한 것은 넘기고 큰 쟁점만 가지고 싸우자. 지식은 지식이고 신앙은 신앙이니까."

그러나 그는 신앙과 관계되는 시험문제의 경우, 신앙에 배치되는 답을 요구하는 문제에는 답안 작성을 거부하는 대범함도 보였다고 한다.

그가 목청껏 자기의 목소리를 외칠 수 있었던 것, 답안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던 것은 그의 평소 지론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크리스천은 수비적이고 비크리스천은 공격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 오히려 크리스천은 공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적극적인 자만이 살아 남는다" 뭐 이런 생각인 모양이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단순히 내 신앙만 지키면 되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더 많은 도전과 공격이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지키는 것에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공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잘 모르면서 떠드는 것은 차라리 침묵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질문에 대해 적극 동조한다. 그는 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말한다. 특히 학문적인 영역에서 신앙 얘길 하면 왕따 하는 게 사실이라고 하니, 신앙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래서 많은 경우 얘길 하는 게 좋을까 참아야 할까를 고민하게 된다. 분위기상 말하지 말아야겠다는 경우는 참는다고 한다.

공격적인 그를 말 못하게 하는 분위기는 뭘까? 이야기를 꺼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이 "싫다"거나 "너 얘기 해라, 나는 안 들을테니" 한다거나 하면 그는 말을 못한다. 역시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적극적으로 얘기에 참여하는 특이한 사람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침이 튀게 된다, 당연히.

그에게, 자신 없는 크리스천이나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크리스천에 대한 대안이 있냐고 슬며시 물었다. 개인적으로 싸우기에 너무 힘이 부치기 때문에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개인의 약함을 전체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몸이 그 사람을 보호해 줄 수 있어요." 좋은 말이다. 그러나 한편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즐기고 마니 문제다. 잘 싸우라고 몸을 준 것이건만.



유형 2. 잠잠한 크리스천


황세비 (모대학 전산학과 4학년, 26세)

누가 묻기 전에는 크리스천임을 알리지 않는다. 미리 나서서 말할 필요는 없다. 왜? 크리스천임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하는 속사정은 무엇인가? 자신이 없어서? 아니면 더 깊은 뜻이?


햇빛 한 번 못 본 것 마냥 하얀 피부다. 새까맣게 그을린 기자의 팔이 무척이나 무색하다. 토론은커녕 컴퓨터 앞에만 붙어 앉아 있었을 것 같은 인상 때문에, 이번에도 잘못 찍었다는 느낌이 팍! 온다. 아니나 다를까, 학과 특성상 토론문화가 활발하지 않고 특별히 모여서 이야기하는 시간도 없다고 한다. 이 땡볕에 무슨 고생인가 싶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재촉하니 조금 말이 나온다. 주로 모이게 되는 것이 술자리인데 그나마 군대 가기 전에는 그런 과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김이 팍 센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소외감이나 고립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제대하고 나서 나이도 먹고 하니 고민이 많이 된 모양이다. 그 때부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술자리에 가셨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우와, 그 이유가 더 멋지다. "그곳에 사람이 있으니까."

이제 술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내용과 거절하는 방식에 초점을 모아보자.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당연히 그 이유를 물을테니. 적어도 그는 '신념'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한단다. 특이하다. 신앙 때문도 아니고 신념 때문이란다. 보통 사람들은 이걸 신앙이라고 한다. 한 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더 여러 번, 자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처음에 거절하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최소한의 힘이 될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생각은 좋다. 그러면 어떻게 이야기하나 들어보자.

크리스천이라고 밝히냐고 당연한 질문을 했더니 아니란다. 친구들일 경우에 말을 못한다고 한다. 나의 약한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이러하다는 말을 하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말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거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 해야지.

그런데 이야기가 엉뚱하게 간다.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묻는데, 자꾸만 전도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크리스천이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는 권유 정도로 멈춘다. 언젠가 한 번 친구에게 '교회 한 번 와 봐라. 그리고 네가 판단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단다. 전형적인 전도방식으로. 불교를 믿는 그 친구는 "네가 한 번 (절에) 와 봐라. 그러면 나도 (교회) 가보겠다"고 했단다. 그 친구에 그 친구다. 그 때, 우리 주인공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단다. 왜 그랬을까?  내가 가지는 못하면서 오라고만 하는 자신의 편협한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윽! 상대주의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평소 이런 질문 받는 크리스천들이여! 이것이 상대주의임을 기억하시라. 그리고 넘어가지 마시라.


대학생 크리스천들은 몸으로 떼우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단다. 그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말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어떻겠는가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행동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단다.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말이 수반되지 않으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묻지도 않는 문화 이야기를 한다. 크리스천들이 자기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비판도 한다. 세상 속에 파고들어서 바꾸어야 한다며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온다. 과거에는 기독교가 문화를 주도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면서. 기독교적 입장에서 문화를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 문화를 적절히 변형시켜서 교회에 들여오는 것 같다고, 이것을 고쳐야 한다고... 이랬다 저랬다...



유형 3. 넌너난나 크리스천


박수상(모대학 경제학과 3학년, 26세)

나만의 하나님이면 그만이다. 누구에게 강요하고 떠들어 댈 것이 무엇인가? 나만 잘 믿으면, 나만 지키고 있으면 되는 거지... 그리고 바르게 살면 되는 것이다.


"말을 안 해요. 하면 지니까." 시작부터 마음에 든다. 솔직하다. 어렵게 말을 빙빙 돌려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번에는 제대로 찍은 듯... 그가 공부하고 있는 도서관은 모 선교단체(차마 이름을 밝힐 수 없다)의 아지트라고 불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선교단체 사람들이 도서관 자리를 매번 불법적으로 차지하는 모양이다. 거의 한 줄 전체에 책을 뿌려놓고 자리를 맞추어 놓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학생들이 아주 싫어한다. 그들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이미지가 다른 크리스천들에게도 고스란히 전가된다. 망신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부정적이기 때문에 말이 먹히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알게 하는 게 옳은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 모 선교단체에 이가 갈리는 모양이다.


얼마 전 그는, 우연히 단군신상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거기에는 단군신상을 반대하는 기독단체의 성명서 같은 것이 붙어있었던 모양이다. 그 순간 역시 그 앞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 성명서를 발로 걷어차는 걸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그 사람 옆을 지나가면서 한 마디 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지 않았다. 몇 마디 하다보면 감정적인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고 아무 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물론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좀 다르다. 그가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한다. 크리스천답게. 교회 다니니까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그의 친구들도 인정을 한다. 그도 역시 친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인정해 준다.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너는 너니까' 하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는 말을 맺으려는 듯 한 마디를 강한 어조로 내뱉는다. "난상토론 하느니 차라리 땅이나 파라" 솔직한 답변에, 인터뷰를 마쳤다.


기독 대학생들의 경우 성경적 원리에 대한 확고함이 없기 때문에 흔들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학을 공부한 사람의 경우는? 신학을 공부한 뒤 다시 일반학문을 하고 있는 이상한(?) 대학생들을 만나 보았다. 다음 두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두 사람의 차이를 주목하시라.



유형 4. 바른 길 제시형


김명철 (모대학 철학과 2학년, 26세)

옳은 것을 옳다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 가만히 있는가? 하나님을 핫바지로 아는가?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느라고 바쁜 그를 붙잡고 아주 숨가쁜 인터뷰를 했다. 요점만 간단히.

그는 토론자들이 크리스천인 경우 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편이다. 그러나 크리스천끼리도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상대주의가 만연해 있음을 많이 발견한다고 한다. 그런 경우 그는 주저없이 말한다. 한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으로서 차이보다 공통점을 부각시키고 나누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고. 그는 단호하다. 그가 느끼기에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상대주의는 '자신의 열등감을 보완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 같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상대주의는 토론을 막는다. 토론에서는 공통점을 찾아 지향하는 게 중요하지만 상대주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크리스천들이 기독교에 대한 공격을 해 올 때 그는 삶으로 이야기한다. 그들이 공격하는 대부분은 왜곡된 시각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그럴 때는 참된 기독교와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렇지 않음을 알리고 스스로 보여주려고 많이 노력한단다. 그러면 그들도 돌아온다고. 정말 그럴까? 뻘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맨날 붙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잠깐 만나는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은 많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지 않는가?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어려운 경우, 특히 수업시간의 발표나 강의 시간에 진행되는 토론의 경우는 좀 다르단다. 이론에 대한 발표의 경우, 그것 자체가 불완전한 것임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신의 부재를 통해 아는 영역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라 하더라도 자연의 영역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멋진 말이지 않나? 최대한 깊이 알려고 노력하되, 신의 영역을 전제하고 발표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추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의심이 생긴다. 그렇다면 일반대학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크리스천으로서 학문을 하려면 모두 신학을 택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일반대학의 장점을 이야기한다. 신학교와 일반대가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신학생들의 경우 신에 대한 학문을 한다는 것 때문에 우월성을 갖고 있고, 다른 학문에 대해서는 매우 폐쇄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대학의 경우 개방적이기 때문에 신학을 배경으로 다른 학문을 섭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다. 그는 일반대학을 다니면서 오히려 철저하게 따지고 합리적인 논리로 이야기한다. 불완전한 학문영역을 드러냄으로 더욱 믿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니, 미천한 기자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신학을 하고 일반학문을 하게 된 것이, 신학교 안에만 머물러 있던 연약한 인간을 더욱 튼튼한 신앙인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 같다"는 그의 고백은 아름답다.



유형 5. 침묵하는 크리스천


허호정 (모대학 철학과 2학년, 27세)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일반학문의 길을 선택했으나, 쉽게 입을 열지는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생각이 많아서 함부로 말하지 않지만,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만큼은 확신하는 크리스천... 내 것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사슴처럼 맑은 눈이 그의 침묵을 대변하는 듯 하다. 뭔가 깊은 뜻이 있는 듯. 그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경우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지만 되도록 논쟁은 피한다. 특히 크리스천들과는 더더욱 그렇다. "상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성경이 가르치는 일반적인 교훈들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라는 반문에 할 말이 없다.

비크리스천들의 경우 지식적으로 더 많이 아는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관점이 다른 것 또한 사실이란다. 그러면서, 성경이 표준이고 원칙인 것은 사실이나 그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남북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예측하고 사고하여 방안을 모색해 보지만, 일반 사람들의 경우 경제적인 측면이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남북통일의 필요성이나 방법들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내 원칙을 강요하는 것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진리가 가리워지는 경우에 말을 해야 하는데 상대주의나 개인주의 앞에서 말하는 것을 멈추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서도 그의 대답은 반대다. "멈추는 게 오히려 지혜롭지 않나?" 또 반문이다. 그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충분한 논리를 펼 수 있으려면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대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권위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 논리에 수긍하고 인정하기 때문이란다. 그가 침묵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크리스천들이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가치관을 사회전반에 실천하며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고 본다. 진리체계를 부인하라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는 한동대 교수님들을 존경한다. 성경적 가치관을 사회 전 분야에서 실천하자는 취지로 한동대를 세웠고 그러한 이념으로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을 높이 사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회개혁은 사회 어느 한 부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 사회에서 어느 한 부분만 개혁한다고 사회개혁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전반에 개혁이 일어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수업시간에 믿지 않는 자에게 침을 튀며 강요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자리에 서라는 거다.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위치에서 살라는 거다."

"진리를 가리는 것은 우리의 소극적 행위라기보다 우리의 무지 때문이다." 멋진 말을 툭 내뱉는다. 사람들이 진리를 말한답시고 떠드는 것에 어지간히 지쳐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무지한 크리스천들이 변증한다고 떠드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흔히 변증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 학문의 허구를 드러내고 그 위에 성경의 올바른 진리체계를 드러낸다는 뜻인데 많은 경우 잘 알지 못하고 떠드는 것을 본다.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현명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논리적, 체계적이라고 보는데 더러는 감정만 앞세운 광신자들처럼 자신의 신앙체계만 고집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그러나, 말해야 할 때 말하면 좋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충분히 알아서 말할 때가 오기나 할 것인가? 기자의 무지한 질문에 대해 그는 무안을 팍팍 준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기독교의 가르침을 알기는 어렵고 세상 학문의 벽은 어마어마해서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점진적인 계시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세상 학문의 허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가치관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계속되는 그의 주장이다. 그가 말하는 얘기할 때라는 것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질문이나, 기독교 전반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때라는 것이다. 그럴 때는 당당하게 기독교의 대변자로서 말하지만 그 외의 경우 개인적인 가치관을 주장하는 것은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자신의 가치관을 자신의 것으로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사회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위치에 서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문학의 영역에서 신의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며 기독교의 정체성마저 뒤흔드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는다. 이러한 문학의 영역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쓸데없는 논쟁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이성관이나 결혼관 등이 바탕이 된 글들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어떤 한 주장을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체계가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 때문에 끝까지 주장하지 못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절대진리라고 말하면 안 된다. 더 넓은 가치관, 신앙, 지식을 갖게 되면 더 넓을 것을 보게 되는 법이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아는 범위에서 말하되, 그것이 전부인양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섯 가지 유형의 크리스천들은 비단 다섯 사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당신은 어떤 유형의 크리스천인가? 성경에서 요구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김후지 기자

 

■ 커버진단


눈감으면 코 베가는 대학,

눈감고 코 내주는 크리스천?


밀려오는 캠퍼스의 문화와 시대 정신, 역류하지 못하고 휩쓸리는 크리스천의 모습


'이른 아침 대학 캠퍼스에 들어서면서, 한 번쯤 무언가에 대해 '승리'할 것임을 다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또래의 교인들이나 선후배들에게 "승리하라"며 호출기의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넣어 준 적이 있다.'

대학을 다니는 젊은 크리스천들이라면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이야기.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여기 '대학'에서 도대체 무엇에 대해 승리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지를. 몇 명의 비크리스천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시키거나, 세속적인 사람들 천지인 캠퍼스에서 하루종일 평온하고 기분좋은 정신상태를 유지하면 승리를 쟁취한 것일까? 일정 시간동안 착한 일을 했거나 캠퍼스가 떠나가도록 통성 기도하고 찬양한 것, 하루종일 강의를 듣고난 후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임에도 교회에 나가 여러 가지 청년부 모임에 참가하면 적어도 찜찜하고 패배감 비슷한 상태가 플러스로 전환되는 듯한 기분, 이밖에도 장학생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 등등…. 이런 상황들이야말로 우리가 은연중에 인정했던 승리의 결과물들은 아니었을까? 굳이 '승리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뭐 이 정도면' 대학에서 크리스천으로서 비교적 정당하게 산 것은 아니었나 자위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위와 같은 정도의 수준으로는 그리 만족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눈치챘을 게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대학에서 크리스천답게 사는 것인가.


눈 감으면 코 베가는 대학문화


대학이란 학문과 대학문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사상과 정신들이 난무하는 곳이다. 오늘날의 학문과 대학문화는 이성을 가진 우리에게 늘 행동과 생각을 바꿀 것을 촉구한다. 문제는 거기에 하나님의 뜻에 지극히 반(反)하는 생각과 행동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순간이 다가오면 크리스천은 그가 가졌던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상적 가치관 사이에서 언제나 갈등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갈등이 시작됨과 동시에 기독교 복음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즉 진리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여있음을 발견하고서 이내 당황하곤 했다. 현대 정신들과 각각의 학문들이 추구하는 바를 정립하지 못하고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캠퍼스에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고작 캠퍼스 전도나 소규모의 가스펠 콘서트들, 그리고 자기가 속한 선교단체에서 벌이는 봉사활동에서밖엔.

눈에 보이는 종교적 행동 외에 다양한 사상과 생각, 학문적 관점들의 무차별 공격 앞에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가는 지 궁금하다. 그래서 대학 캠퍼스에서 생활하는 크리스천들을 만나보았다. 그리고 몇 가지 유형의 문화들과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지 알아보았다. 대학문화를 처음 맛보았던 대학 초년생과 크리스천이었지만 이젠 무신론을 택한 운동권 친구를, 그리고 과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중년 교수까지.


술잔 하나에 흔들리는 신앙


대학에 갓 들어온 신입생들이 크리스천으로서 맨 처음 고민하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선배들이 건네주는 술잔을 받는 순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다행히 새내기들에게 강압적으로 술을 강요하는 '무서운 선배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받아든 술잔 앞에 여러 가지 생각으로 심란해진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거야?

"과 모임에서 술을 권할 때 나는 잔을 받아 건배까지만 하고 술은 마시지 않았다. 이런 행동에 대해 내가 크리스천임을 밝혔을 때 우리 과의 경우 술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쟤는 술 먹이면 안돼'하면서 동조해주었다.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대부분이다."(채희성, 20, 무등교회)

다분히 군사문화의 산물로 여겨졌던 비인격적인 '음주 강요'. 심지어 술을 마시는 것 자체로 신앙을 판단받던 시대는 이제 한물 간 듯 하다.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의 여부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존중'이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여지는 개인주의의 시대니까. 자, 그러면 이제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크리스천들에게 맘 편한 세상이 온 것인가? 아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이 술을 대할 때 어떠한 생각과 태도를 가져할 지 바르게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겪은 한번의 경험은 여전히 오랜 죄책감으로 그들을 괴롭힌다. 신입생 환영회 때 술을 마셔보았다는 장자연 자매(여, 20, ㅈ대 유아교육과 1년 재학중 휴학)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선배들과 동기들 중엔 크리스천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 중 2, 3명 정도는 철저히 술을 마시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난 술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할 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막연히 안 마셔야한다는 것도 싫어서 (술을) 마셔 보았다. 언젠가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너도 크리스천이냐'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무척 힘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용인되는 요즘 시대라 할지라도 그것은 술자리만의 이야기일 수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입장을 정리한 것이 대학생활하는 데에 손실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과의 특성상 인맥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데 대개 친목써클을 통해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킨다. 친목써클 활동을 하려면 유대감이 필요하지만, 술을 못 마시면 써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된다. 대개의 교제가 술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아예 써클 자체에 못 들어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써클 분위기에 적응하는 크리스천들도 있는데 대부분 신자로서 술을 마셔야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헤어나오기 어려워한다."(홍상문, 20, 전남대 의예과 1년)

이렇게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이들. 또 죄책감 때문에 예배드리기도 힘들어하는 이, 혹은 신앙과 현실간 논의를 중단하고 신앙따로 현실따로의 이중적이고 안일한 삶을 택하는 이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크리스천이 술을 마셔야 하는가 마셔서는 안되는가'의 질문에 대한 해답엔 개인적인 신앙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주목할 점은 술 문제로 인한 신자의 고민에 누가 그 답을 내렸는가이다. 술에 대한 신자의 자세에 대한 정통 교리의 설명이나 성경적인 해답이 적다는 데 문제가 있다. 스스로가 술 문제에 대해 '신앙'에 비추어 '알아서' 판단한 다음, 그것에 안주한 채 행동하게 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나도 크리스천이야. 성경엔 취하지 말란 구절밖엔 없어. 술을 마시지 말란 명령은 없다구', '서양에서 술은 음료야. 나도 술을 음료라고 생각하며 마실 뿐이야.' ...더군다나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크리스천 선배들의 모습은 신입생들이 행동을 결정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친다.


운동(movement), 할까 말까? 고민되네?


술 문화 외에도 크리스천 누구에게나 고민을 안겨주는 또 다른 문화는 바로 '운동권 문화'. 대학에 들어가면 누구나 적극적, 소극적인 형태로 이른바 운동권 참여를 권유받게 된다. 물론 대상이 남자 새내기일 경우 더 적극적일 수 있다. 드디어 '크리스천으로서 운동을 해야하는 것인가? 아니면 해선 안 되는 것인가'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로에서 어떠한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선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운동이나 폭력은 나쁜 거야'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애써 외면하는 학생이 있을 수 있다. 신앙을 개인적인 종교활동으로 국한시킨 채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전제를 가진 운동권 활동에 치중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해답을 찾으려도 하지 않은 채 학업에만 열중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은 운동권 활동을 하다가 인본주의적 사고에 휩싸여 신앙을 버리는 이들이다.

여기서 의문을 갖게 되는데, 운동권 문화의 '무엇' 때문에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신앙이 흔들리거나 버릴만큼 갈등하게 만드는 것일까?

"크리스천 중엔 운동권 문화에 대해 아예 무관심한 채 학교와 집, 그리고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러다가 신앙을 포기하기도 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정체성이 없는 상태인 데다, 모태신앙을 가지고 막연하게 교회를 다니던 아이들이 운동권 문화의 인간적인 면에 이끌려버리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것 같다. 운동권에서 부르짖는 '정의로움'이라는 것에는 누구나 쉽게 매료되기 때문이다."(손병동, 18, 전남대 경영학부 새내기)

이처럼 크리스천들이 운동권 문화에 매료되는 이유는 바로 교회생활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인정과 감정적 따스함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앙이 메마른 상태에서 교회를 계속 다녀야 했던 신자의 경우는 운동권 문화에서 누릴 수 있는 인간애와 정의로움에 더욱 쉽게 사로잡히기도 한다. 또 운동을 하다보면 교회는 구제와 사회개혁적인 활동에 소극적이고 방관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한 때 교회를 다녔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고 있는 손광우 씨(23, 전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 3학년 재학)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기독교는 그러한 상황들을 '길게 보는' 관점을 가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급박하게 손길이 필요한 현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사랑하는 이들이 최루탄과 국가의 폭력 앞에 쓰러지는 것을 보게 된 내게 있어, 크리스천의 관점이나 행동은 방관자의 그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책임해 보였다."

크리스천이 아무런 준비 없이 운동권 문화에 휩쓸리다보면 결국엔 교회냐 운동이냐의 양자택일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유물론과 관념론의 차이랄까? 두 전제가 매우 상이하다. 운동권의 전제를 보면 '신'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사회를 개혁할 명분과 당위성이 생긴다. 운동권이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이들은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괴로움도 그나마 교리를 배웠거나 어느 정도 신에 대한 지식을 갖춘 아이들이어야 가능하다. 그렇게 갈등하다가 운동이나 교회, 둘 중 하나를 아예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손병동) 사실 우리 주변에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몸이 교회에 있다할지라도 그들은 이미 하나님 주권 신앙을 거부한 상태로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뻔한 대답만 연발, 기독교 싫어 싫어!


최근의 학문은, 이제 인간의 근원을 찾고,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현상들이 어디서부터 왜 오는 지 등등의 물음에 대한 대답 찾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수백년 동안 학문이 목표로 삼았던 '진리 추구'의 가치는 포기되었고, 이제는 결과에 있어서 인간에게 편리하고 유용하여 행복을 가져다 주는 실용주의로 눈을 돌렸다. 지난 학기 <민속학개론>이란 강의를 수강한 J양(23, 광주한뜻교회)은 수업 첫 날부터 민망함을 금치 못했다.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 <민속학>에 대해 설명하다가 종교의 영역을 거론하는 부분에서 "내게 있어 성경은 하나의 훌륭한 문학작품에 불과합니다."라며 전체 수강생에게 단언하신 것. 이후 토속적인 굿과 주술적인 민속신앙의 사례가 비디오와 오디오를 통해 현장감 있게 수업에 반영되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귀를 막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학문의 흐름, 세상의 흐름이 이렇다보니 기독교 역시 개인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차원에서 믿고 따르는 세상 종교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신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연구 대상이 된다. 혹 수업시간에 이러한 분위기가 공공연해지면 크리스천들은 성경 꺼내기도 두려워진다. 번번히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 그 탁월성을 드러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동성애가 왜 나쁜 것인지, 진화론의 오류가 무엇인지 사회과학의 한계가 무엇인지 공학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입을 다물었고 그들은 대답하라고 추궁하는 세상이다.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알려주어야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이제는 오히려 세상이 요구하고 있다. 우리 입을 바라보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처한 삶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신앙적인 의문에 교회가 답 해주길 원한다. 그러나 교회의 대답은 아직 미흡하기 짝이 없다. 사회주의 운동 앞에 크리스천이 되길 포기했던 손광우 군은 자신의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교회의 목회자나 교사와 상의한 바 있다.

"언젠가 신한국 당사 앞에서 데모를 하고 나서 청년부 예배에 참석했다. 이 날 전도사님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서로 기본적인 바탕으로 깔고 있는 생각이 너무 달랐다. 쉽게 말해 나는 '피부에 와 닿는' 방법과 길을 원했지만 그분은 그것을 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적으로 전혀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H 교회가 <기독교장로회>였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렇듯 교회 중에서도 그나마 사회 참여적인 성향을 가진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내게 해답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게 그분의 말씀은 전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 신앙으로 이겨내라는 등의 자기 다짐식의 요구가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최선의 대답이자 뻔한 대답이 된 것이다.


진리 알아야 바른 행동 가능해


정립된 생각과 사상은 일관적인 행동을 낳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를 보여주어야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를 '잘 아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일하시며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잘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한다. 본연의 사명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 반하나님적 지성과 정신이 난무하는 캠퍼스의 흐름에 아무런 대책 없이 휩쓸려 가는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이제 알맹이 없는 '열심'은 그만 촉구하자.


'기독교의 수많은 가르침과 노력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도록 하는 데 집중되고 있지만, 정작 성경은 우리의 우선적 과제가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지성)이 새롭게 변화되는 일은 요술과 같은 미신적인 기교나 혹은 피상적인 종교적 열심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진지하며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노력과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보다는 이 시대 정신에 의해 우리의 삶이 영역들이 더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 우리의 삶에 대한 건설적이며 비판적인 검토와 도전을 거부하며 우리가 경건한 체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일 것이다(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마이클 호튼, 역자 서문 중에서)'

정설 기자



■ 커버 인터뷰 1


"예수는 사생아 출신 민족 영웅이야!"


손병동(18, 광주재건교회, C대 경영학부 휴학)


수업시간에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점을 이야기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손군의 대답을 실었다. 수업중 맞닥뜨리게 되는 크리스천들의 당혹스러움. 우리도 한 번쯤 이런 경험 해본 적 있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특별히 크리스천으로서 당혹스러웠던 적은 없었는가?

서양문화의 역사에 대해 가르쳤던 교수님 한 분께서 수업시간에 예수라는 인물은 사생아로 태어난 능력 있는 젊은이로 평가하셨던 적이 있다.


같은 수업을 수강하던 크리스천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몇몇 크리스천들이 반발하는 입장은 표했으나 속시원히 증명할 수가 없었다.


교수님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교수님께서는 성경 상에서 마리아의 몸에서만 낳았다고 말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사생아에 불과하며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성경을 진리로 여기지 않으니,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인물, 즉 불우한 환경과 역경을 딛고 수많은 유대 군중들을 환호하게 하며 사랑과 자비를 부르짖었던 한 사람의 민족 영웅, 정치가에 불과했다.


논쟁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가?

교수님께서는 크리스천들의 성경적 설명에 대해 그것이 너에게는 진리이지만 나에겐 아니다라고 반문하셨고 그것으로 논쟁은 종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답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분의 표정에는 불쾌감이 역력했고 비크리스천들이 보여주었던  공통점은 종교적 논쟁에 대해 거의 크리스천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흥미롭게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의 반론은 수업의 흐름을 끊는 방해물 정도로 치부되는 기분이었다.

정설 기자



■ 커버인터뷰 2


신념과 학문은 둘이 아닌 하나


조정일 교수(41, 광주벧엘교회, 전남대 생물교육학)


<한국창조과학회(이하 창조과학회)>는 기독교 학문적 입장을 가진 연구집단으로서 세속 학문의 흐름과 명확한 대치상태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창조과학회> 전남지부장을 맡아 활동중인 조정일 교수를 만나, 당면하게 되는 현실에 대해 질문하였다.


<창조과학회>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는가?

대학원생 시절이었던 1982년에 처음으로 <창조과학회> 활동을 시작했다. 참고로 <창조과학회>가 창설된 해는 1981년이었다.


<창조과학회>가 구체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당시 학계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창설 당시 매스미디어는 학회에 대해 크게 주목했으며 홍보를 많이 해주었다. 학계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크게 반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결코 학문적 정설(定說)로는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연구 및 활동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을 텐데.

학문적 정체성을 얻기가 매우 어려웠고 학자들도 정작 연구 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쉬운 예를 들자면 창조론은 논문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연구자가 대학에서 논문을 쓰는 것과 견지하는 신조를 조화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 과학계는 어떠한가. 창조론에 대해 가지는 반응은 여전히 배타적인가.

매우 배타적이다. 철학자들이야 상대주의적인 입장으로 대응하지만, 과학계는 여전히 배타적이다. 과학계가 기존에 경험주의를 신봉했을 때도 그러했고 경험주의가 약화된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창조론에 대해 '지적 자살'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는 신앙을 가진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칠텐데.

이러한 경향이 워낙 일반적인 까닭에 크리스천 중에서도 창조론을 개인적인 신앙으로만 국한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타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하는 과학자의 신념에 따라 과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학은 과학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고 믿음의 지배를 받는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과학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창조과학회>에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지금까지도 창조론적 관점에서 과학에 대한 논의를 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학회 자체적으로라도 논문집을 내고 그것을 출판하는 데 힘을 써야 하며, 이 작업을 현재 진행 중이다.


진화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자연계의 현상들이 있다. 진화론을 견지하는 과학자는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설명할 수 없는 자연계를 바라보는 과학의 입장은 알다시피 크게 두 가지, 즉 진화론과 창조론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진화론자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발견하더라도 '창조'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진화론만을 주장한다. 그들의 눈에는 진화만 보이므로 갈등의 여지가 없다. 한편 이러한 자연계 앞에서 창조론자들은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첫째, 신앙과 학문을 분리하여 자신의 신앙을 합리화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이들은 창조론을 신앙으로만 믿고, 학문 활동을 할 때는 진화론을 추구한다. 둘째로 신앙과 학문을 조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사실로 인정된 진화론을 창조론과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대표적으로 창세기의 어느 부분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등의 시도가 그것이다. 이런 시도는 대부분 신학자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세 번째로는 완전히 진화론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에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진화론을 추구한다.


요즈음 신과학이나 대체의학, 민속공학 등이 대두하고 있다. 기존의 과학적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과학의 이름으로 수용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왜 그것을 과학이라고 하는가.

우선 과학과 공학을 구별하고 이야기를 해야할 것이다. 즉 과학은 현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고 공학은 인간의 필요와 활용을 위해 고안하고 만들어내는 것이다. 과학 철학자들 가운데엔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주의적 관점을 가진 이들이 많다. 질문에서 제기한 것들이 요즘 과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흐름인 것은 사실이다. 과거엔 서구의 과학과 행위만 옳다 했지만 이젠 다른 유형의 것들이 가능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런 인식의 변화에서 시스템 과학이나 뉴에이지, 신과학이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점은, '관점의 또 다른 개방'이라고 여길 수 있다. 또한 인류와 문화의 축적에 기여했다는 점에 있어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과학은 합리성과 객관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시할 때는 또 다른 위험이 우려될 것이다. 비합리성과 주관성을 강조하는 요즘 새로운 과학 조류들은 이런 점에서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다.


교육학의 전제는 인간을 기본적으로 선한 존재로 인정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고 본다. 교수님 개인적으로 교육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한 마디로 '갈등관계'다. 기독교 학교가 설립된다면 기독교적인 관점을 담은 내용이나 방법대로 가르치고 공부할 수 있을텐데 주어진 교육과정이 있고 그에 따르다 보니 세상 학문과 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있지만 기독교적 교육철학을 펴기엔 어려운 점이 많다.


대학에서 생물학과 교육학을 가르치면서 크리스천 학생들이 기독교적으로 정립된 그들의 관점을 답안에 반영하는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없다. 크리스천임을 밝히는 이들은 있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을 밝히거나 정립하고 있는 이들은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기독교적 관점을 세상에서 펼치기 어렵다는 갈등 속에서 나름의 대응방식을 터득했다면 어떤 것이 있는가.

먼저 공직에 있으므로 주어진 임무에 충실히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학문 자체를 '잘못'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진화론자가 밝힌 내용이라고 해서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교육기법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제는 해석이 다르다는 점이다. 논문을 모아 교수 기법과 교과과정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해석하여 가르치는 것, 그리고 기독교 소양과 철학을 가르치는 것. 이 두 가지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매우 필요하다. 그래서 이번에 <창조과학회>에서는 교사 연합회를 결성하려고 한다. 그 동안 이 두 가지를 따로따로 가르쳐왔지만 이번 시도를 통해 연합회의 회원들에게 통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즉 학습이론과 세계관을 동시에 심어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김후지 기자





■ 지상대담


'홍길동, 대학에 가다' 역자 김성현 씨 지상대담


김성현 (GSF 협동간사, 한국에너지개발연구소)


홍길동, 대학에 가다' 라는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나 이유는 무엇인가?

1997년 가을에 대학 동기인 대전 IVF 노종문 간사로부터 이 책의 원전인 'Chris Chrisman Goes to College'라는 책을 빌려 보게 되었다.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일반적인 반기독교적 분위기와, 캠퍼스 기독 동아리들의 반지성적인 태도 때문에 많이 고민했었기 때문에, 미국 대학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날카롭게 그린 첫 장의 이야기에 당장 빠져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90년대 말의 한국 사회와 대학도 이 책이 그리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 대학의 문제들은 좋든 싫든 미국 대학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한국 대학에서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우리 식 대응을 생각하기 전에 우선 미국을 잘 아는 저자가 어떻게 대안을 제시했는지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두 세 장을 읽은 후, 혼자 읽기가 아까워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좀 더 꼼꼼히 읽고 싶어 조금씩 번역해서 천리안의 GSF(대학원생회) 동호회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했다. 책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러나 대충 번역한 것이니까 배포는 하지 말라는 단서를 달고 대학원생 지체들과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한국 IVP에서 정식으로 출판 제의를 해왔다.


대학문화 속에 들어가는 크리스천들은 많은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대학생과 크리스천 사이에서 한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괴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는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80년대 학번인 나는 두 가지 혼란을 겪었다. 하나는 대학에서 내 사고체계를 좀 더 엄밀하게 세우려고 노력하면서 지금까지 다분히 순진(naive)하게 주입된 내 신앙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었고, 그것은 나름대로 혼란스러운 과정이었다. 또 하나는 아마 80년대 후반의 특수한 상황에서 생긴 것 같은데, 소위 '사회 참여'의 문제, 즉 내가 가진 기독교 신앙과 현 사회의 문제들을 함께 놓고 볼 때, 과연 내 신앙 양심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고, 교회는 이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고민, 그리고 실망과 좌절감 등이었다.

친구나 후배들 가운데서는 이러한 혼란 가운데 결국 자신의 신앙을 버린 경우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신앙을 지킨 경우에도, 대학원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세속 학문과 대면하면서 우리가 배운 기독교적 지성이 무력해짐을 많이 느꼈다. 학문의 패러다임과 신앙의 패러다임 사이의 괴리를 견디다 못해 신앙을 버릴 뻔했던 후배도 있다.

이것은 대학문화가 진리 개념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기도 하고, 교회가 지성을 무시함으로써 대학문화를 대면할 힘을 대학생들에게 길러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교적 온건한 합리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은 그것을 증명해보라는 것이었다. 즉, 비신자들은 기독교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크리스천이 합리적으로 신앙을 설명해 주어서 그것이 납득되면 (물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겠지만) 받아들일 자세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대학문화가 현대성의 말기 현상, 즉 포스트모던으로 이어지는 극단적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로 물들면서 오히려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고, 기독교가 유일성과 배타성을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따돌림당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대학문화에서 혼란을 경험하는 기독 학생들이나 선교 단체는 주로 어떻게 대응하고 있으며, 그 방법은 어떻다고 평가하는가?

혼란에 직면하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교회나 선교 단체는 나름대로 도움을 주고 있으나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대학문화를 파악하고 이것에 유연하게 성경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필요한데, 오히려 대면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우리 교회는 영성을 지성과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지성적인 탐구를 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영성을 국한시켜 왔다. 이런 경향은 심지어 지성적 측면을 강조해 온 선교단체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대학생들은 캠퍼스에서 대면하는 혼란들과 씨름하기보다는, 주일에는 교회로, 주중에는 캠퍼스 내의 게토나 다름없는 동아리방으로 숨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최근에 캐나다 IVF에서 교수 및 대학원생 사역을 담당하시는 분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 분 말씀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대학들에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 자신들이 그런 대학에 걸맞은 수준밖에 안 되는 지도 모른다 (maybe we deserve it)"고 하였다. 즉, 대학 복음화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대학 구성원(그것도 학생들에 주로 중점) 개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매달려 있지, 대학 자체를 위해 기도하거나, 바람직한 대학의 모습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기독인 개인 또는 선교단체가 대학의 문화와 삶 속에 한 구성원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데 문제가 크다고 생각한다. 대학에 다원주의 문화가 들어왔기 때문에, 어찌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대학에서 기죽을 이유가 전혀 없다. 그들의 논리로 따지자면, 기독교도 받아 들여져야 할 하나의 문화에 해당할 테니까. 그러나, 기독인들이 사회 따로 교회 따로인 것처럼, 캠퍼스에서도 늘상 자기들끼리만 모여 다니면서 대학 따로, 기독 동아리 따로 식으로 겉돌면 결국 직무 유기라고 생각한다. 기독인 개인들과 기독 동아리들이 좀 더 대학 문화의 적극적인 구성원들이 되면 좋겠다.


신앙 문제는 개인의 가치관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많다. 진리의 선포와 개인의 가치관이라는 애매 모호한 구분선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게 된다. 크리스천이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가?

구원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는 양보할 수 없는 한계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과의 "대화"에서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정말 비신자들을 볼 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원한다면 말이다. 비신자들을 지옥에나 떨어질 죄인으로, 나는 구원받았으니 너희들 보다 잘났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한편, 사회 문제나 윤리적인 문제라면 훨씬 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구원의 문제를 말할 때는 단지 "태도상" 주의가 필요하다면, 이런 문제에서는 심지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란 사실 하나님의 뜻을 지금 상태에서 이해한 정도에 불과하다. 사회 문제나 윤리적 질문에 정답을 제시하거나 비판할 때는 적어도 우리가 삶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선까지만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경적 세계관이나 원리들을 공부하고 발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보통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 좀 더 정확하게는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성경적인 관점을 갖고자 노력하자는 생각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입학을 앞둔 겨울이었다. 지금은 잘 알려진 미들톤과 왈쉬의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라는 책을 별 생각 없이 제목만 보고서 사서 읽은 때부터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세계관 스터디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기독교학문연구회나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의 활동도 알게 되었다.

선교단체로는 SFC와 IVF에 관여하면서 개혁주의 사고에 더욱 익숙해졌다. 신앙과 전공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결국 어릴 적 야심(?)이었던 물리학자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당시 예수원 대천덕 신부님의 영향으로 토지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경제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는 KOSTA(북미유학생수련회)를 통해서 훌륭한 신앙 선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송인규 목사님과 개인적 친분을 갖게 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유학 시절 한때는, 나 자신의 지나치게 지성적인 성향에 염증을 느끼고, 전도와 선교에 치우치기도(?) 했었다. 1년 정도 공부는 거의 손을 놓고, 교회 영어권 청년대학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고, 미주 한국 CCC 협동간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학위를 받고 귀국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진출하며 다시 고민은 시작되었다. 미국의 선진화된 문화에 비해 아직 뒤떨어진(?) 부분도 많지만, 한편 미국의 몹시 나쁜 문화들은 아주 빠르게 수입되는 것이 보여서 였다. 마침 대학 동기들과 후배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GSF에 연결되면서, 앞으로 우리 나라의 지성 사회를 주도할 지금의 대학원생 형제 자매들을 돕는 일에 힘을 쏟아야겠다고 생각했고, GSF 지체들과 교제하고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여러 가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 겪었던 혼란과 극복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나는 우리 나라에서 진행되어온 기독교 세계관이나 신앙과 학문의 연계 노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기존의 기학연이나 기대설 등의 활동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 더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드러내 놓고 기독교적 학문을 추구하다 보니 오히려 반지성적이며 성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가 나타나면서 기독교적도 학문적도 아닌 어정쩡한 결과가 나타날 위험이 있는 것 같다.

대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열린 태도를 갖고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하고 교양을 쌓으라는 것이다. 세속 학문이나 사회를 비판하려면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안전한 기독교 서적만 읽고 나서 어설픈 비판을 하지 말고, 진지하게 배우자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전공 분야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학생이라면(대학 진학시 학과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고, 취직 걱정을 해야 하는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또 전공과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실 수도 있는 것이므로, 모든 대학생이 전공 분야를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비기독교인들 보다 더 진지하게 자신의 전공을 탐구해야 한다.

실제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전공의 역사를 공부해 볼 것을 제안한다. 현대의 학문은 적어도 수십 년에서 수  백 년의 오랜 기간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학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하려면, 그 학문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만 씨름하기보다는 자신의 관심사와 연계되는 구체적인 문제들에서부터 성경과 전공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지금의 영역에서 또 다른 문제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학문과 신앙'의 문제가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하다.

최근에 GSF에서 George Marsden의 The Outrageous Idea of Christian Scholarship(한국 IVP에서 번역 출판 예정)이라는 책을 스터디했다. 지금껏 나온 신앙과 학문에 관한 책들 중에서 비교적 솔직하고 또 학문 세계를 실제로 잘 아는 사람이 쓴 것이다. 그런데 그 책에서도 결국 과연 기독교적으로 학문을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속 시원하게 대답을 못했다. 기독교 용어나 개념을 쓴다고 해서 기독교적 학문이라 자신할 수는 없다. 자신의 삶과 세계관 속에 성경적 사고가 녹아 들어 그것이 자신이 쓰는 글, 하는 활동에 모두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고 세속 학계에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면서 무언가 인간과 사회에 기여하는, 또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그런 학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평생 숙제라고 하겠다.

개인적으로 요즘 생각하는 것은 기독인으로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자는 것이다. 기독교적 학문이란 결국 세속 학문에서 무엇 무엇을 삭제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학문에다가 기독교 신앙이 기여하는 바를 추가하여서 그것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비기독인들이 미쳐 놓치는 부분을 보고 새로운 질문도 던지고,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요즘 우리 나라의 스크린쿼터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직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조금 설명하자면, 보통 스크린쿼터를 옹호하기 위해서 경제 논리보다 문화 논리를 앞세우는 것을 보고, 경제 논리를 통해서도 스크린쿼터를 옹호해 보면 더욱 효과적이지 않을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것은 나름대로 성경의 메시지에 영향을 받았다. 우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있는데, 각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경제학의 논리가 절대절명의 진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분명히 선하게도 사용될 수 있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보던 일단 내가 배운 경제학을 활용해 보려고 한다. 또한 학문의 가치를 생각해 볼 때, 구체적인 문제에서부터 사회 현실을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홍길동, 대학에 가다'에서도 공동체에 관해 언급하고 있었는데, 흔들리는 크리스천들에게 대안이 되어 줄 수 있는 방법이 공동체라고 보는가.

우리 개인이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사실상 "홍길동, 대학에 가다"에서 저자 제임스 사이어가 설명하다시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음을 주장해서, 종교 개혁뿐 아니라 개인주의의 씨앗도 뿌린 셈이다. 물론 생명이 걸린 성경 해석의 문제를 소수의 사제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편 나 혼자 읽고 내린 결론이 올바르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공동체, 좀 더 구체적으로는 교회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종교 개혁자들이 대항하였던 로마 카톨릭에서 약간은 다시 가져와야 하는 것이 있다. 오해는 말길 바란다. 카톨릭은 교회에 권위를 주면서 사실상 사제들과 교황을 교회와 동일시하였다. 그런 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는 여전히 권위를 가져야 하고, 그렇게 공동체적으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가 물론 지금의 특정 교단, 교회들에서 나타나고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우선은 교회가 좀 더 개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이 보이고 있는 위험할 정도의 사제 의식은 대항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위 평신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신앙의 활동성을 찾아서 이것을 교회로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위해 대학생들은 캠퍼스에서 단지 고립된 게토와 같은 공동체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열린 공동체, 대학 사회를 섬기는 공동체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학문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함께 대화하는 공동체, 그리고 학문의 영역에서는 같은 전공이나 비슷한 관심 분야에서 크리스천들이 대안적 공동체를 구성해서 세속 학문 세계와 대화하는 가운데, 기독교 신앙이 공헌할 수 있는 바를 제시한다면 크리스천들 자신 뿐 아니라, 대학 전체에 큰 유익이 되리라 본다. 즉 대학문화나 학문 세계를 무조건 퇴치해야 할 적으로 보지 말고, 그곳에서 무시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 사실은 어떤 좋은 유익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식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혼자보다는 공동체로 나가는 것이 원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가망이 있다. 그 공동체는 특히 생활 단위이자, 전공 단위인 과를 일단 기초로 하되, 대학원 정도에서는 좀 더 열린 태도를 위해 학제적 접근이 가능한 수준이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김후지 기자

■ 커버논단 1


현대 문화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Part 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대단히 원론적인 화두지만, 다시 한번 끄집어 내 보자. 차근차근 원리에서부터 점검해 보기 위해 지겹지만 바닥부터 생각을 맞춰 가보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원론적인 질문. 우리는 그 답을 로마서에서 찾을 수 있다. 잠깐 개괄적인 것을 보고 가는 것이 순서이겠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를 반역하여 늘 불의를 행하는 타락한 존재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있다. (로마서는 축복이니 사랑이니 놀라운 계획이니 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먼저 진노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에 유념하자.) 지금 우리는 늘 허망한 삶을 살아가며, 사사건건 진리를 거부하며 배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진노를 발하고 계신다. 이것이 인류가 처한 '큰일날 상태', 곧 우리의 끔찍한 현실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진리대로 행치 못하고, 또 그저 우리 마음에 좋을 대로 행하면서 어둠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렇게 '내어버려진' 우리들의 상태, 그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진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다. 칭의와 성화의 기적, 바로 구원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가 있다. 이 역사의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홀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 전적(全的)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 세상과는 구별된 자로서, 주어진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우리의 지정의가 기본적으로 늘 진리의 원리 안에서 행하도록 변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방식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그 진리를 드러내고 고백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우리는 이 땅의 불의를 분명히 거부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단지 행동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살면서도 그것을 '괜찮은 일'처럼 생각하거나, 적극적으로 불의를 거부하고 사는 것을 마치 '손해 보는 삶'처럼 생각하는 태도까지도, 그 정신까지도 분명한 잘못이며 죄인 줄 알고 적극적으로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 식의 삶의 모습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이며 궁극적으로 불신자들의 생활 양식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여전히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제시해 주신 세세한 삶의 법칙과 원리를 따라 살아가지 못하고, 그 동안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갔던, 우리의 사고와 정신을 지배해 왔던 세속의 원리에 여전히 찌들어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도전해 오는 시대 정신들, 즉, 상대주의 다원주의 개인주의로 명명되는 오늘날의 세계관과 사조들은, 그런 점에서 엄중하게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 정신들은,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따라서 거룩한 성도로서 살아갈 진리의 법칙, 삶의 표준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 든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수많은 물음들이 존재한다. 세상에 하나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너도 옳을 수 있지만 나도 옳을 수 있는 것 아니냐,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느냐, 너는 그것을 주장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주장한다, 세상에 완전한 교회가 어디 있겠느냐, 대충 살다가 가는 것이지…, 왜 너는 너만의 사상을 나에게 주입시키려 하느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구원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 뭐든 열심히 잘 믿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느냐…. 이런 모든 말들은 결국 그 밑바탕에 하나의 소리, 하나의 사상이 깔려있는 것이다. 인류가 타락의 때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살아온 반복되는 사악한 반역의 질문들이다. 곧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계시냐는 것이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분의 주권(主權)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시대 사상의 거대한 바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도 강한 힘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깨뜨리고 나아가기에 두렵기 그지없는 도도한 흐름이다. 언제나 이 싸움에서 우리는 각개 전투로 나아가 승리할 수 없었다. 그리나,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대항하며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된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다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당연히 그 답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그분이 보여주신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달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늘 원론적인 이야기뿐이라고 투덜거리시는 분들이 있는데, 원리부터 차근차근 짚고 넘어가자는 심오한 뜻에서 이러는 것이니 이해하시라.) 여기에 뒤따르는 당연한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보여주신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적 세계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세상을 볼 때는, '관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그것을 '세계관'이라고 많이 표현한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무엇인가,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나와 세상은 어떤 관계인가, 신은 있는가, 신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싫든 좋든 이런 관점들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경적 세계관이 주어져 있다.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그분의 은혜로 인해 우리가 깨닫게 된 세계관이다. 나와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이고,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며, 그러나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으로 인해 거듭난 백성으로서, 주의 법을 지키며 호흡이 있는 동안 죄악된 이 땅을 살아가다가, 주께서 허락하시는 그 때에 그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영광 중에 거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것…. 간단하게 몇 마디로 표현한 이 성경적 세계관이 우리 중심에 정립되어 있을 때, 우리는 세속 정신과 투쟁하여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 '승리'할 수 있다. 또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시대 정신의 정체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수많은 사상들의 근본적인 정신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의 말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려는 같잖은 시도인 것을 비로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적 세계관의 핵심은 무엇일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일관된 체계의 대답을 얻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믿는다. 이것이 성경적 세계관의 가장 큰 축이며 기준이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왜 만드셨는가? 여기에는 그의 기쁘신 뜻 외에 그 어떤 다른 이유도 없다. 우리는 왜 타락했으며 세상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역시 이것도 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속한다. 교회는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왜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상한 족속이 되어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 주권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안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때문에 존재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지금의 세상이 있고 교회도 있고 나도 있는 것이다.


이 세계관의 큰 틀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하심은  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 쉬신 창조의 사역에서 그 기본 구조가 드러난다. 잠시 머리 복잡한 접근을 해 보자.

먼저 창조와 타락과 구속에 이르는 역사는 창세기 6일간의 노동의 기간에 대응된다. 이것은 곧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6일간 일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께서 주신 은사로 이 땅을 경작하며 다스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사명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위임받은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일곱째 날 안식의 때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큰 틀이다.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지킬 법칙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양심의 법, 곧 하나님의 도덕법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나 부패한 본성을 좇아 늘 하나님께 반역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모든 일이, 선(善)을 행한답시고 행하는 일까지도, 어쩔 수 없이 악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이제 내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령의 주권적 역사에 따라, 이 땅에서 구체적인 직업을 갖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생애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식 아래 자연스럽게 문화가 창출되는 것이다. 무슨 '문화 명령'이라는 것이 따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의 문화 창조라는 개념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그러나 또한 생각할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안식을 기다려야 한다. 노동은 계속될 수 없다. 하나님의 목표는 이 땅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잘 이루어 가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이 아니다. 목표는 칠일 째 주어지는 안식에 있다.  안식의 상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원한 세계이다. 그것을, 그 선의 충만한 상태를,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바른 자세이다. 우리는 부조리와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안식할 소망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호흡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초월해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주의 나라를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그것은 우리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Part 2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제부터 조금 민감한 문제를 다룬다. 어쩌면 놀라거나 당황하게 될 수도 있다. 자기와 똑같은 세계관을 갖고 사는 다른 신자들의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접할 때 느끼는 놀라움, 혹은 두려움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접하고 거듭난 인생으로서 이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유형 구분은 우리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양식을 조금만 분석적으로 바라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 첫 번째 자세는 방관 혹은 구분, 분리 배타적인 자세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지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이 세상은 타락했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며, 세상의 문화는 사탄이 지배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런 문화에 대적하여 반대 입장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극적으로는 세상을 등지고 오직 천국만 생각하며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만을 소망한다. 한편 적극적으로는 세상을 사탄과 하나님의 대결 구도로 보고, 그 신비한 영적 전투가 계속되는 현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 문화에 대항하고, 그것을 거부하고, 그들과 동일한 삶을 살지 않으려 애쓴다. 우리 주변에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사역단체 '낮은울타리'가 이런 비슷한 신앙 자세를 보이고 있다. 사탄 문화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과의 영적 투쟁을 선포한다. 교회사를 통해 이런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자기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곳에 틀어박혀 경건의 생활을 하거나, 세속과의 모든 줄을 끊고 수도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 대 사탄의 한판 승부에서 하나님 편을 들어야 하므로, 당연히 세상을 포기한다는 태도이다.

두 번째 자세는 반대로 허용 혹은 관용의 자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삶에 무슨 관심이 있으시겠느냐'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다. 세속에서는 세속 법칙, 교회에서는 교회 법칙으로 살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는 태도가 이 생각 때문에 나타난다. 역사적으로는 영지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세상은 악하며, 우리의 신앙은 세상과 완전히 배치되는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므로 세상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육체는 어차피 악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악한 세상에 살면서 악한 행동을 하고 있더라도 우리의 영혼만 순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자유함(?)을 누린다. 요즘 많은 성도들이 이런 자세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신앙을 영적인 영역에 한정시키는 태도이다. 이런 신앙 자세가 적극적으로 표출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전혀 없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의 법칙이과 하나님의 법칙이 서로 상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나머지, 결국은 구분점이 흐려지고 하나님의 법칙이 모호해진다. 일반은총 영역을 너무 강조하게 되어, 나중에는 진리의 벽이 쉽게 무너지게 되는 잘못된 신앙 태도인 것이다. 일반은총 영역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또 그들과 함께 하는 문화 활동이 하나님 앞에서 그 나라를 이루는 일에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예가 있다.)

이 두 가지 자세가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모두 성속 이원론(聖俗二元論)에 해당한다. 언뜻 보면 두 번째 자세는 이원론이 아닌 듯 하지만, 엄밀히 분석해 보면 결국 하나님의 법칙이 삶의 전 영역에 영향력을 미친다고 믿지 않는 것이므로 이원론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하나님 절대주권주의와 전혀 빗나가는 사상이다.

세상의 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그분의 통치하에 있다는 신앙이 바른 세계관이다. 하나님이 마치 사탄과 대등한 위치에 서서, 세상 악을 해결하기 위해 힘들여 사탄과 전쟁을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패하시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권능이 미치지 못하는 세속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신앙이 영적인 영역에 국한된다는 식의 신앙 또한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 되심과 섭리하심에 대한 불신앙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최소한 이 이원론만큼은 당장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바른 신앙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자. 그러나 여기에도 엄밀한 구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의 자세 중에도 그 나타나는 방식에 있어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편의상 이들을 문화 적극주의와 문화 소극주의(또는 문화관조주의)로 표현하도록 한다. 이 두 가지 유형은 크게 봤을 때 똑같이 성경적 세계관의 맥을 따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세상의 전 영역과 성도의 전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우리는 이들을 비교하면서 둘 중 어떤 신앙 자세가 하나님 절대 주권을 더 엄밀하게 따르느냐의 기준을 두고 진리 여부를 판단해야 하겠다.

문화 적극주의는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화란의 유명한 신학자에 의해 '문화변혁주의'라는 개념으로 연구되며 적용되고 있다. (이후부터는 문화변혁주의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이 개념은 우리가 흔히 들어온 "하나님 나라" 개념과도 비슷한 것으로, 현재 한국 정통 신학의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또 수많은 선교단체나 문화사역 단체가 이 개념 하에 만들어졌고 운영되고 있다. 문화변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라는 표어로 대변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통해 그분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신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하나의 그림을 보자.


앞에서 본 그림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불연속선이 있고 없음이다. 문화변혁주의는 세상의 연속성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중간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죄가 끼어든 것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 곧 죄를 제거하는 역사를 시작하셨고, 그래서 그 죄만 없애면 다시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리라는 것이다. 창조-타락-구속의 구조이다. 이 땅에서 죄가 말끔히 제거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그분의 문화가 이 땅에 가득 차는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아주 많이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대다수의 문화사역 단체가 문화변혁을 외치며 활동하고 있다. 이들 단체의 특징은 '헌신'과 '적극성'으로 대표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문화를 창조할 일꾼들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역을 인간이(우리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만큼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니까 서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강박관념까지도 가질 수 있다. 다시 그림을 보자. 이 땅은 변함이 없이 계속 존재한다. 단지 중간에 죄가 들어와서 모든 것이 헝클어졌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면, 창조시의 모습이 일그러져 오염되고 훼손된 피조물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고, 이렇게 우리가 이룩한 문화는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소유가 된다는 구조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하나님 나라는 빨리 도래할 것이고, 또 그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문화도 풍성해 진다는 결론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이 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문화 소극주의는 다르다. 이 신앙 자세는 "하나님의 주권 이 땅 위에!"가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 이 땅 위에!"라는 신앙 자세를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스스로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일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를 변혁하고 회복시키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홀로 열어 가신다. 타락한 세상에서,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온전히 구속하시는 것이다. 이런 식의 신앙 자세는 문화변혁주의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신앙에 더욱 근접한 것이다. 문화 소극주의는 '아브라함 카이버'와 동시대에 살았던 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가, 더 나아가 '죤 칼빈'이 일찍이 견지했던 문화를 보는 정통적 시각이었다. 이를 한국의 개혁주의성경연구소 김영규 목사는 '문화관조주의'라고 표현하여 연구 및 적용을 하고 있다.

문화변혁주의와 문화관조주의는 결국,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어디까지냐, 그리고 인간의 역할은 어디까지냐의 시각 차이로 인해 세계관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화변혁주의는 구속의 사역이 영적으로, 또 물질적으로도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러나 문화관조주의는 이것을 사람에게 관련된 부분, 즉, 성도(또는 성도의 집합인 공동체 교회)의 차원으로 본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 창조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역이 아니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문화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은 여전히 타락한 상태로 있다. 바뀌지 않는다. 구조와 질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창조부터 재림까지는 시공(時空)의 질서이고 6일간 노동하는 문화의 영역이지만, 그 이후 영원은 안식의 영역이다. 둘 사이에 엄청난 불연속성을 갖고 있다. 시공이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안식에 있다. 지금 세상을 바꾸는 것이,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로 변혁시키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이것이 문화관조주의가 가진 세계관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의 큰 틀에 보다 더 일치하는 신앙의 자세는 문화관조주의이다.

문화관조주의가 올바른 신앙 자세라고 했을 때, 우리는 당장 구체적인 삶에의 적용과 사례가 궁금해질 것이지만, 우선 그 원리를 보도록 하자. 원리를 알면 가변 상황에서 길이 보인다. 문화관조주의가 주창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확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의 통치를 받는 자로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그네란 이 땅에 관심을 갖는 자가 아니다. 그의 목적지는 영원, 곧 안식의 처소이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 우리 힘으로 뭔가 해 보려 하지 않고,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서 그가 허락하신 삶을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그네는 또한 이 땅의 문화에 대해, 그것이 계속해서 더욱 더 타락하여 가는 것을 직시하면서, 그러나 그것을 바꾸거나 파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고 또 우리가 바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문화에 대해 늘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개혁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서, 모든 여건이 알맞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 뜻대로 개혁이 척척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죄악된 세상을 단지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프지만 인내하면서, 그러나 또한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개혁의 시도를 해 보면서, 그러면서도 그 개혁이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으시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인식하면서,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펼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이 되어 주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현재의 문화 속에 보이는 질서를, 그것이 부조리와 불의가 난무하는 세상일지라도,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인정하면서, 견디며, 인내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그네에게는 전부이다. 마구 달려들어 변혁하고 개혁하려는 시도는 꿈은 좋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하심을 무시하고 내가 세상을 고쳐 보겠다는 꼴이 된다.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영역에 대해 그분의 역사를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더 지혜로운 자세이다. 우리의 역할을 까닭 없이 평가절상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의 위상을 까닭 없이 비하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문화관조주의는 마치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저 바라만 보라는 말처럼 들린다. 방관이나 다를 바 없지 않는가 싶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관조'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 때문이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에도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이 공존한다. 차근차근 보자.

먼저,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논의 된 바와 같이, 오늘날 문화는 하나님께서 열어 가셔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문화는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증가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모든 것이 허물어져 가는 방향이며,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고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문화 창조, 문화 변혁…. 이러한 개념들에 대해 우리의 시각은 언제나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시대는 결코 낙관적이지 못하다. 경험적으로 보더라도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시도는, 과학적 철학적 인문학적 모든 시도는 그 결과가 선한 쪽으로 나타나기보다, 그 종국이 항상 좌절과 절망과 어두움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다. 우리는 문화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개혁될 대상이기 보다 멸망으로 갈 대상으로 보고 소극적인 자세로 대하는 것이다. 소극적이고 싶어서 소극적인 게 아니라 소극적일 수밖에 없기에 소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 문화관조주의는 오히려 문화변혁주의보다도 더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이 세상이 결코 나그네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그러하다. 세상은 언제나 늘 나그네를 안주하게 만든다. 나그네에게 정착을 요구한다. 우리에게 우리의 신분으로서 걸맞지 않은 행동을 늘 요구하게 된다. 하나님의 법도와 방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말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나그네로서의 삶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그런 유혹을 받으면, 비록 영원한 안식을 향해 끊임없이 가야 할 우리들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누리려는 정 반대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주께서 끌고 가시고자 하는 그 영화로운 자리에 이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유혹이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안주할 것인가? 결단코 그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이미 나그네가 아니다.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자연히 '투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투쟁은 어쩌면 생명을 요구할 때도 있다. 이때 우리는 진리를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인 삶이며 더 단호하게 죄와 싸워야 한다. 나그네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이 분명한데, 그것이 아닌, 엉뚱한 이 땅의 법칙대로 살기를 강요받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법도를 어기도록 요구받을 때 - 그것이 뇌물 수수가 되었든지, 주일성수에 대한 압력이 되었든지 - 우리는 그것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라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 아무리 불합리한 처우를 받을지라도, 불이익이 눈앞에 뻔할지라도 우리는 말씀 앞에서 원칙대로 순종하여야 한다. 우리는 어차피 나그네이며 안식을 향해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도중에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실망하지도, 낙심할 필요도 없다. 주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다. 문화관조주의가 문화변혁주의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라는 근거가 여기 있다.

(하나만 예를 들자. 영화 [미션]을 본 사람이라면 거기 나오는 두 신부의 모습을 비교해 보자. 원주민들을 죽이려고 다가오는 군인들에게 신부가 폭력을 수단으로 대응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주님의 가르침인 사랑을 강조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옳은가. 우리는 여기서 불확실하게나마 문화변혁과 문화관조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폭력을 쓰려는 한 신부에게 다른 신부가 "그들을 도우려면 신부로서 도우시오! … 하나님은 사랑이시오!"라고 꾸짖는 장면이 인상깊다. 신부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침략군의 총탄에 그저 쓰러졌지만 신부는 할 일을 다 한 것이며, 결과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부분이었다. 문화관조의 차원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는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문화 변혁의 관점에서 그 신부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것이다. 그저 장렬하게 폼잡고 있다가 총에 맞아 죽은 것 뿐…. 반면에 싸움에 나간 다른 신부들은, 목적이 승리에 있었다. 결과가 성공으로 나와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싸우는 도중 불리해 지자 작전상 후퇴를 한다. 물론 앉아서 죽느니 조금이라도 더 저항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적극적이고 무엇이 소극적인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어떤 삶의 자세가 하나님의 주권을 더 신뢰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아무리 엄청난 세속의 정신이 우리에게 다가올지라도, 우리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를 그들에게 가감 없이 담대히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문제 노동문제로 토론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대안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되돌아올 반응은 뻔하다. 남들 다 받는 촌지를 혼자 거절할 때 뜻밖의 시련이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욕을 먹고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거기서 어떻게든 이겨내고 합리화하려고 머리를 굴리지 말고, 언제나 법대로 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 우리는 잘못된 것을 분명히 잘못으로 고백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또 스스로 그렇게 살려고 힘쓰되,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하거나 그것을 파괴하지 않는 자세, 그 질서를 보존하며 나그네로서 사는 삶의 자세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절대 주권 정신을 손상시키지 않는 정당한 행동이다. 하나님 절대 주권의 절대적인 신뢰,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까지도 우리가 요구받는 엄연한 진리이며, 올바른 세계관이며, 신앙하는 방식이며, 의연한 삶의 자세인 것이다.

황희상 편집장

1999년 9월호 인쇄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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