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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마리

아모스 강해 (8)

본문 : 아모스 9장 1∼6절 말씀

아모스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무엇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무엇으로 삶의 기준을 삼아야 하는 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신약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지만 아모스서를 통해 참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서를 통해 우리는 북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대로 살고자 하는 자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파멸의 자리로 들어가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모스서에 기록된 약 2700∼2800년 이전의 교회 현실을 보면서, 마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의 교회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시대가 변하여 인간의 삶의 방식도 달라지고, 계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식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근본적인 뜻은 동일한 것입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 그동안 무리하게 재정을 운영하던 교회가 부도를 맞았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아모스서를 대하는 자세가 더욱 절실하게 됩니다.

'교회의 부도!'. 이 낯선 용어가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단순히 건물이 부도난 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불변의 진리를 소유케 하신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진리에 대해 부도가 난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북이스라엘의 메말라 있는 영적 현실을 향해 날카롭게 지적했던 때와 동일한 시대적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자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담긴 말씀을 도외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자들에게 발하신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본문을 대하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엄중하신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9장 1절에서 4절까지 먼저 보겠습니다. 핵심적인 부분은 4절의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을 보시고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라고 볼 수 없기에 그들을 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잘못을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라, 잘못을 들추어내어 그 뿌리를 뽑으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셨습니다. 예를 들어 3절을 보면,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며 벌하심입니다.

죄인들이 음부에 들어가 있다 허더라도,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또한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 대한 죄악성을 찾아서 벌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하나님의 진노입니까?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이처럼 적극적으로 진노를 받는 당사자라면, 얼마나 하나님께 범죄한 자인지를 상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죄악이 무엇이었습니까? 사실 아모스서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내용은 8장 11∼12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북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죄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과 같은 사역자들에게 말씀으로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맡은 선지자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대언(代言)하였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선지자를 배척하였고 멸시하였습니다. 그 선지자에 대한 거부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이며, 하나님의 참된 뜻을 도외시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북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죄악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 그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도의 자세가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 성도의 삶은 자신의 판단과 경험이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 인접 국가의 종교를 따르게 되며, 세속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아니 교회에서조차,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를 마치 자신들이 듣기 좋고 보기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 또는 교회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예배를 세속화시키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들이 그렇게 따라오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 양 무시해 버립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자들이 교회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진지한 자세로 말씀을 잘 읽어 나간다면,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얼마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시대가 변하듯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불변의 진리를 담아두는 의식으로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순서 하나 하나가 신학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시대가 변하더라도 교회의 전통으로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세세한 차이는 있어도 기본 골격은 같으며, 그 예배가 말씀이 중심이 된다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루아침에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드라마 예배나 연극 예배로 바꾸는 것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무지한 태도입니다. 열린 예배라는 명목으로 예배를 무절제하게 임의적으로 듣기 좋고 보기 좋은 방식으로 바꾼다면 교회의 세속화가 더욱 빨리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아니라 신앙에 근거한 교육을 함에 있어서는 현재의 시대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든지,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을 배우든지 하는, 현재 벌어지는 사실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분별력 있는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첨단의 내용을 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세상을 향하여 나아갈 뿐만 아니라 교회를 향하여 진리를 보존하려는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분을 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을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영향을 받아,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켜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근본적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국가를 어떻게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신앙을 어떻게 담아 두었는지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여로보암의 죄악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자신들에게 있던 참된 종교를 스스로 이방 종교와 타협하여 만들어 낸 종교로 바꾸어 놓고 종교적인 행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8장 11절 말씀처럼,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기근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어리석은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우리 생활의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을 잠시 접어 두고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생활하지는 않습니까? 눈에 드러나는 현상에만 치중하여 세속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참된 본연의 모습은 감춰 버리지 않았습니까? 이런 죄악의 결과가 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같이 정직하게, 진지하게 받지 못한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북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확증적인 말씀을 그 다음 구절에 하십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를 그의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땅을 녹게 하시고 그 땅에 사는 자를 멸하시는 것은 인간의 권위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5절과 같은 표현은 애굽에서 자연적으로 벌어지는 나일강의 범람을 연상케 합니다. 때가 되어 나일강의 물이 나일강 근처의 땅에 범람하여 더 좋은 땅으로 바꾸는 것을 염두에 두게 되는데, 일단은 나일강의 범람으로 지역의 땅을 쓸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하고 어리석은 행동들을 쓸어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6절에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니 그 이름은 여호와이니라". 이런 말씀을 대할 때 주의할 점은,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세상을 완전히 멸하려고 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명확하게 나타내시는 방식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이 부분은 다음 달에 아모스서를 마무리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을 사는 백성들에게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면에서의 영적인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어린아이에게 선물을 주면서 그 선물의 의미를 말해주는 것처럼, 구약 교회를 향하여 현실적인 축복과 저주를 말씀하시면서 그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애굽을 떠나 가나안땅으로 가서 정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가나안 땅이 인생에 있어서 최종적인 자리라고 생각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보면서, 그리고 그 곳으로 들어가서 정착하면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예비하신 것처럼 자신의 인생에도 영원히 안식할 처소를 예비하실 것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약 교회를 어린아이같이 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내용에 현실적인 표현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5, 6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시는 바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보다는 성경을 받고 있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표현된 내용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군의 주이신 하나님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 백성의 어리석음과 세속적이고 이방 종교에 물들어있는 모습에 진노하심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지가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북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겨서 성도로서의 참된 삶을 보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도 분명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모스서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보면서 참된 교회, 참된 성도로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진리를 담고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권형록 목사 / 안산 푸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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