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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투고


voice21 1997년 8월호 팡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읽고
"난 매순간 하나님을 배반한다. 매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생각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이게 떳떳해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내 자신의 모습 속에서도 붙드시고 그 분의 뜻을 두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 끓을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어쩌면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세우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는 자신과, 매 순간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성이 끊는 자신을 발견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중략)…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는 것보다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TheVoice> 21호(1997년 8월호)에서 발견한 송민창씨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란 수필을 읽으면서 무척이나 많은 공감을 하였다. 진솔하고 절실한 표현이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글이다. 송씨는 이 글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무엇이며 내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인지 심각하게 고민한다. 신앙은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많은 행사 위주의 열심만으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으며 자신의 공허함을 신앙적인 행사의 분주함으로 메우기 위한 값 싼 감정에 매어 달리느라 정작 신앙의 본질은 잊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자문. 순간 순간의 감정을 잡으며 그것에 그치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확인되는 삶과 믿음의 거리, 끝없는 자책들…. 그리고 그는 결론 짓는다.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우선 내가 과연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인가에 먼저 시선을 돌리자고….
젊었을 땐 한동안 성경적 지식에 미친 듯이 매어 달렸다. 칼빈사상, 개혁신앙, 정통 보수 신앙을 외치는 수많은 신학서적들. 수많은 성경공부. 마치 지식 자체가 목적인 것처

럼 이러한 교리들이 나의 머리를 채웠고, 자라온 교회의 교단적 긍지(?)로 인한 우스운 신앙적 비교 우위의 도토리 키재기 같은 자만에 빠져 이단 시비, 잘못된 교리비판, 교단 비판에 무수한 정력을 낭비하느라 정작 중요한 신앙의 본질과는 멀어졌던 나를 발견하게 됐다. 내 지식적 판단의 분별력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 모든 성령 운동은 무조건 배척하고, 성경을 조금 안다라는 것이 바리새인과 같은 자랑거리가 되어 우쭐해 했던 바보 같았던 나.
어느 날부터 전혀 변화하지 아니하는 나를 발견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되 전혀 변화하지 아니하는 현실을 발견하였다. 머리 속에 있는 성경적 지식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매순간 하나님을 배반하고야 마는 비참한 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분명히 믿으나 '점진적 성화'는 교리로서만 존재하고,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여전히 변화하지 아니하고 똑같이 매순간 하나님을 배반하고야 마는 나의 모습…. 말씀이 더 이상 감격스럽지 아니하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는 교회 생활. 말없이 본을 보이기보다는 행하지도 못하는 교리를 남에게 가르치기만을 즐겨하는 본성. 사람의 눈을 하나님의 눈보다 더 의식하는 가식적 거룩. 누가복음 12장 47절의 경고대로 신앙의 도는 들어가 있어도 행하기를 원치 아니하여 중한 채찍으로 맞아야하는 신앙인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습관과 같은 종교적 매너리즘에 빠져서 듣기만 즐겨하고 행하지 아니하여 스스로 속이는 망상(약1:22)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상반절) 이 구절을 놓고도 고민했던 적이 있다. 과연 무엇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인가? 주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많은 행사가 결국에는 사람의 의를 구하게 되는 우리의 본성을 어찌해야 하는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가? 왜 나는 입으로는 주여 주여 외치면서 매순간 하나님을 배반하고야 마는가? 그리고는 괴로워하는가? 왜 나의 이러한 고민은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가? 이러한 나 자신의 모습을 놓고 고민하는 것이 옳은가?  마음 편하게 신앙 생활 할 수는 없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독선적이고,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주장 고집하기를 즐겨하는, 젊었을 때는 혐오하였던 이러한 형용사들이 어울리는 편협한 신앙인이 되어 가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주님은 관념 속에서만 살아 계시고 결국은 나의 판단대로 나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만의 신앙인. 지식만의 신앙인. 왜 이리도 안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 것일까? 왜 머리와 가슴과의 거리는 이리도 좁혀지지 않는가? 평생 교회를 다닌 나는 왜 참 그리스도인다운 변화가 없는가? 일평생 한번도 신앙의 본질에는 접근을 못하고 껍질만 두드린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고민하였다.
그러나 혼자 고민하였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라는데 젖어 있었다. 아니, 신앙 문제로 고민을 나눌 상대가 없었다. 나는 교회 집사여야만 했다.
청년회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소그룹모임에 나이 많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절실함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다는 절실함으로…. 매주 소그룹 단위로 같이 모여 서로의 처지를 숨김없이 내어놓고 서로를 위해 절실하게 같이 기도하는 기도의 생명력으로 인해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던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는 관계에 대해 눈이 뜨여 갔다. 형제들과 가식 없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점차 가식을 버

려가며, 서로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힘있게 맞잡은 손아귀에서 전해져오는 사랑의 능력을 느끼면서 깨달았다. 신앙은 이제껏 내가 붙잡아온 관념이 아니라 관계인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눈에 보이는 형제들과의 사랑의 관계…. 신앙은 형이상학적인 관념이 아니라 형이하학적인 관계일 때 비로소 능력이 되고 비로소 삶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일만 스승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꾸준히 같이 격려해 주고 말씀을 함께 실천할 믿음의 동지들이 주변에 필요하다는 것을….
눈이 뜨여 가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씀과 기도와 교회와 성령으로 나에게 말씀하시며 내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신앙적 형식이나 인위적 전통을 고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내려는 관계가 시작되었다. 무능력한 관념적 사랑이 아니고 경험적이고 느낄 수 있는 사랑의 관계를 하나님과 형성해 가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아직도 수시로 하나님을 배반하려는 본성을 이기기 힘든 삶이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들에 대한 나의 의지적 표현이 가능해지고, 비로소 꿈틀대는 조그마한 변화들을 삶에서 경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백운학 / 인터넷 독자, 재미교포

 

Hello. I am A Korean American living in Pittsburgh, Pa., USA. I have read an essay called <The knowledge of God> written by Mr. Song Min Chang in the August issue of The Voice21. I was deeply moved by the essay. It was very honest and right on the point. I have written an essay in acknowledgement of Mr. Song's.
                                          … 필자가 편집부로 보내온 이메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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